◎“정신대 금세기 최대 국가범죄/「모집」아닌 체포… 집단 강간행위/병력 마을 포위한채 마구 연행/43년경엔 처녀없어 주부까지/“일 사죄,1조엔 기금내야” 주장【동경=문창재특파원】 군국주의 일본의 한국인 종군위안부(정신대) 강제연행은 20세기 최대의 국가범죄였다고 일본인 당사자가 털어 놓았다.
태평양전쟁중 정신대 강제연행 책임자로 일할때 「징용귀신」이라 불렸던 요시다 세이지씨(길전청치·78)는 16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만명의 부녀자를 노예사냥처럼 체포해 전장에 몰아넣고 패전후 현지에 버려둔채 철수함으로써 대다수를 죽게한 행위가 유태인을 가스실에 가두어 집단학살한 나치스 범죄와 무엇이 다른가』고 반문했다.
1943년 한국인 강제연행 목적으로 일제가 만든 노무보국회 야무구치(산구)현 본부 동원부장으로 있을때 한국인 징용자 5천명,종군위안부 1천명 이상을 직접 끌고갔다고 털어놓은 그는 『미야자와(궁택희일) 총리가 정신대 문제에 어떤 말로 사죄할지 예의 주시하겠다』면서 일본정부는 사죄의 성의표시로 1조엔의 「선린복지기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일본정부가 정신대 「모집」에 관여했었다는 미야자와 총리의 언급에 대해 『그것은 모집이 아니라 노예사냥보다 더한 체포·구금이었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정부가 위안소 관리에 관여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위안소라면 안락한 매춘시설을 상상시키지만 실제로는 마구간과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으며 매춘이 아니라 집단 강간행위였다』면서 『당시 현지 군부대 군의관이 위안소를 공동변소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일제가 강제연행한 정신대의 수에 관해 『당시 우리는 조선인 징용자 2백만,종군위안부 20만이라고 늘 떠들었었다』고 밝혔다.
『서부 군사령부의 명령이 있을때마다 내가 책임자가 되어 10여명의 징용대를 이끌고 한국에 갔었습니다. 현지경찰과 군부대에서 지원병력을 20∼50명씩 동원해 주었고 트럭도 몇대씩 내주었어요. 경찰이 미리 조사해둔 자료와 지도를 가지고가 지원병력이 마을을 포위한 가운데 마을사람들을 모두 넓은 마당에 모아 젊고 건장한 여자만을 체포했습니다. 노예사냥보다 더 했습니다.』
자신의 강제연행 경위를 소상히 밝히면서 그는 1943년 무렵에는 미혼여성들은 거의 근로정신대에 끌려가 주로 젊은 주부들을 연행했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붙잡아들인 여자들을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에 수용했다가 일본으로 끌고가 주로 동남아시아 남태평양군도의 전선으로 보냈는데 일본군은 패전후 그녀들이 미군포로가 되어 기밀이 탄로날 것이 두려워 집단살해하거나 사지에 버려두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양심가책 「나의 전쟁범죄」 고백록/84년 망향의 동산에 사죄비 세워/요시다 세이지
1914년 후쿠오카(복강)현에서 출생한 요시다씨는 일본의 괴뢰정권이었던 만주국관리를 지냈고 중국 남경과 한구에서 장교대우 군무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어 야마구치현 노무부국회 동원부장으로 발탁됐었다.
60세가 되면서 옛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요시다씨는 자신의 범죄행위를 참회하는 수기를 발간한 것을 계기로 적극적인 사죄운동을 벌이고 있다.
83년 발간된 「나의 전쟁범죄」라는 고백록 인세로 84년 천안 망향의 동산에 사죄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일본에 널리 알려지면서 『왜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느냐』고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협박전화와 편지를 받고 있다.
오는 2월 사회당의 요청으로 일본국회(참의원)에서 정신대문제에 관해 증언하게 돼있다고 밝힌 요시다씨는 『한국 국회가 부른다면 기꺼이 달려가 사실대로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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