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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의 왕” 옛 명성도 헐리고(그때 그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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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백화점의 왕” 옛 명성도 헐리고(그때 그자리)

입력
1992.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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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 박흥식이 세워 일 상인과 경쟁/35년 화재후 신기법 건물건립 각광해방을 전후해 『오늘은 부민관,내일은 화신」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부민관에서 영화 한편보고 화신백화점으로 가서 신상품을 구경만이라도 하는 것이 서민들의 소박한 꿈이었던 시대상을 함축하는 말이다.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는 화신백화점은 해방전후 국내 최대의 백화점.

일제때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이기도 한 화신은 5년전에 헐리고 보신각 건너편 옛 자리에는 대형 백화점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화신하면 곧 일제때부터의 거부 박흥식씨(89)를 떠올리게 된다. 생존해 있는 박씨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때 그자리」를 증언해주지 않고 있지만 화신에 얽힌 야사는 우리나라 근대사 곳곳에서 찾을수 있다.

평남 용강에서 쌀장사로 자수성가,지물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박씨가 1931년 귀금속전문점 화신상회를 인수하면서 반세기 화신의 역사는 시작된다.

낡은 목조건물을 3층 콘크리트건물로 개축,한국인 최초의 백화점주인이 된 박씨는 일본 이누카이(태양) 내각이 금본위제 폐지와 금수출금지를 단행,보유하고 있던 금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횡재를 만나 급성장했다.

「답례용 상품권 증정,사은대매출」 등 백화점 판촉활동은 화신에서 대히트를 한뒤 보편화 될 정도였다.

주먹구구식 경영에서 탈피,출근부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종로경찰서 형사주임을 감독으로 채용,말썽을 빚기도 했으며 늘 웃는 얼굴의 여점원들이 고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35년 1월 대화재로 본점 건물이 잿더미로 변했으나 박씨는 연건평 2천34평,지하 1층 지상 6층의 르네상스식 건물을 신축,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박씨는 기라성 같은 일본 설계가를 마다하고 당시 신기법의 건축설계사로 각광받던 박길룡씨(1943년 작고)에게 설계를 맡겼다.

한·일·양식을 모두 갖춘 5층의 대식당과 6층 소극장은 연일 선남선녀들로 붐볐고 옥상위 불꽃모양의 첨탑과 2,3층에 걸쳐 있던 빨간색 네온의 꽃모양 마크는 화신의 상징이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인기를 끈것은 6층 옥상에 있던 전광뉴스판과 엘리베이터.

신문가판이 없던 때라 행인들은 이 전광판을 올려다 보며 토막뉴스를 접하곤 했다. 공중으로 붕 떠오르다 땅으로 꾹 빠져들어 배멀미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게 하는 엘리베이터는 어른 아이 모두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화신은 미스코시(삼월·현재의 신세계),조지야(정자옥·현재 미도파)를 비롯,본정통(충무로) 일대를 장악한 일본의 상인들에 맞서 종로상권을 홀로 지키는 조선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반도 곳곳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일인들도 화신이 버티고 있는 종로통에서만은 기를 펴지 못했다.

해방후엔 박씨의 일제때 행적을 문제삼아 화신백화점 1층 쇼윈도에 좌익계의 비난벽보가 쉴새없이 나붙었다. 6·25전쟁때는 재고상품을 모두 약탈당하고 화신은 전화속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휴전후 서울로 돌아온 박씨는 화신건너편 지금의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신신백화점을 세우고 56년엔 화신도 복구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매장엔 외국물자가 판치기 시작했고 경영방식도 임대에서 직영으로,다시 임대로 수없이 뒤바뀌며 화신과 신신은 박씨의 재기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곳 저곳에 생겨난 동업자들에게 「백화점 왕」의 자리를 뺏기게 됐다. 흥한화섬,화신전기,화신레나운 등을 잇따라 세우며 활로를 찾던 박씨의 사업도 실패를 거듭,급기야 80년 10월 거액의 부도로 넘어졌다. 화신은 85년 이 건물 일부를 임대하고 있던 신생에 인수됐고 86년엔 한보그룹으로,이듬해엔 다시 삼성생명으로 소유주가 바뀌었다. 건물마저 87년 여름 헐리면서 화신의 50년 영욕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목원대 김정동교수(건축학)는 『화신백화점은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근대건축의 결정체였다』며 『근대건축물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건축학계에서 조차 화신의 철거를 방관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아쉬워 했다.<이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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