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걸려 뭇매맞고 비참한 최후도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식당일을 하는 황모씨(65)는 18세때인 43년 함남 함흥 방직공장에 근로정신대로 갔다가 중국 길림성의 일본군부대에 끌려가 위안부생활을 했다.
황씨는 『일본군 부대가 이동할때마다 많게는 20여명,적게는 5∼6명씩의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이 끌려다녔으며 특히 전투를 앞둔 날에는 평소보다 더많은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며 치를 떨었다.
12살때 동네어귀에서 친구들과 소꿉장난을 하다 납치돼 대만주둔 일본군부대에 끌려갔다는 이옥분씨(66·부산)는 『당시 일본군은 학교,사찰,민간주택 등을 징발해 「위안소」라는 팻말을 붙이고 이곳 한방에 20∼30명씩의 종군위안부를 짐승처럼 몰아넣고 혹사시켰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평소에도 위안부 1명이 10∼20명씩의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으며 지치면 다른 위안부와 교대해 잠시 쉬거나 부엌일을 했다』며 『특히 토요일에는 번호표를 받아쥔 일본 군인들이 수백m씩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던 추악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군의관들이 매주 성병주사를 놓았으나 진주출신의 한 위안부는 결국 병에 걸려 매일같이 얻어맞다 죽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만 남쪽항구 고웅시 주둔 군부대에 딸려있었으며 당시 자신을 포함,이곳에만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38명이나 됐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부산의 박모씨(69)는 길거리 구경을 나갔다가 『일본에 가면 돈많이 벌수 있다』는 꾐에 빠져 남태평양 라바울섬에 끌려가 3년이상을 일본군의 성적노리개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 매일 10명이 넘는 군인들에게 시달리다가 성병까지 얻은 박씨는 한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나 『죽어서라도 고향에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박씨는 성병으로 육신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을 견디다못해 수은까지 몸에 발라가며 치료한 끝에 완전히 폐인이 되고 말았다.
일본이 패망한 사실도 모른채 밀림속서 생활하던 박씨는 해방이듬해에야 귀국했으나 가족들은 모두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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