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일제 자료인멸에 정부도 “무성의”/종군위안부 피해규모 파악 어려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일제 자료인멸에 정부도 “무성의”/종군위안부 피해규모 파악 어려워

입력
1992.01.16 00:00
0 0

◎실상아는 일 당국은 “함구”/당사자도 숨겨… 8∼20만 추정/손배소 가능 불구 실효 못거둘듯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인들의 성욕처리 도구로 끌고간 종군위안부들의 손해배상은 민간차원의 개별청구소송에 의해 가능해지긴 했으나 정확한 피해자 수는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자료자체가 일제에 의해 소각됐거나 인멸된데다 우리 정부의 사료보관 역시 무성의한데다 피해당사자들이 징용사실을 숨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국교생들도 상당수가 종군위안부로 동원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어 피해규모 파악이 어렵다.

얼마전까지도 일본측이 사실자체를 부정해온 종군위안부는 8만∼10만명,많게는 20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돼 왔으나 이 숫자에 최근 확인된 도야마(부산)의 후지코시(불이월)공장에 동원된 것과 같은 국교생들이 포함되는 것인지 여부도 불명확하다.

또 8만∼20만명에는 일본인 대만인들도 포함돼 있으며 이중 80%가량이 조선인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실상을 가장 잘 아는 일본당국의 함구로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75년 당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의 강위종회장이 강제징용,징병실태 조사를 위해 일본후생성을 방문했을 때 위안부사망자가 9만명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나 강씨가 88년 사망하면서 자료가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의 정신대 동원은 공식적으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된 44년 8월23일부터로 12∼40세의 배우자없는 여성들에게 정신근로령서를 발급,군수공장 등지에 동원한 것으로 돼있으나 실제로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37년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일제는 법적근거를 마련하기 전부터 관알선,모집 등의 미명아래 민간업자들을 앞세워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속여 위안부를 송출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전쟁말기에는 동원형식도 거치지 않고 트럭을 대놓은채 부녀자들을 소나 말처럼 마구 끌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위안부들이 끌려간 곳은 주로 남양군도,동남아시아,중국대륙,대만 등지였으나 일본내에도 마쓰시로(송실) 대본영 등 일본군 주둔지역이면 예외없이 위안소가 설치되곤 했는데 동경근교의 가시와(백)시 한복판에는 위안소 건물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처럼 종군위안부들의 피해가 크고 징발규모 자체가 파악되지 않았는데도 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전후 처리문제를 거론할 수 없게 돼 이 문제를 방치해왔다.

정부는 15일에야 정신대 문제의 사실규명을 위해 관계부처합동 실태조사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는데 1차 조사결과는 빨라도 6월께나 발표될 전망이다. 피해자신고센터 설치도 검토되고 있으나 피해당사자들의 수치감과 해방후 47년동안의 사망자 증가,자료인멸 등으로 인해 얼마나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