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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 세력균형과 미역할/기류조류(김경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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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태 세력균형과 미역할/기류조류(김경원 칼럼)

입력
1992.01.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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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미국대통령이 다녀가고 곧 미야자와 일본수상도 서울에 온다고 한다. 워싱턴과 동경이 서로 의논해서 방한하는 시기를 정했을리는 없지만 한반도가 놓여 있는 아시아지역이 그만큼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물론 부시 대통령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아시아방문의 목적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의 시장개방을 촉구함으로써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미국의 실업자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작년말에 아시아방문 계획을 세웠을때는 방문목적의 강조점이 통상문제보다 「신국제질서」를 확립하는데 있었다. 다만 최근에 미국의 국내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는 분위기 때문에 부시는 일단 아시아방문을 연기시키면서 그 목적까지도 국내정치를 의식한 나머지 경제문제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부시는 아시아방문에서 경제적으로 얻은 것이 없을뿐만 아니라 차원높은 외교전략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 미국내의 일반적인 여론이다. 그러니까 부시 대통령은 외교행위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려다가 외교뿐만 아니라 국내정치면에서도 그만 모두 실패작을 만들어 낸 꼴이 되고 말았다.

미야자와 일본수상은 일본경제를 살리기 위해 방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적 역할을 모색하기 위해 서울에 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일본수상이 과거에 일본이 저지른 그 어떤 죄과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발언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일단 일본측의 그런 제스처의 동기에 대해 일본이 새로운 국제적 역할을 추구하기 위한 환경조성작업의 일환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리고 한국측이 일본의 그 어떤 도움,가령 예를 들면 기술이전 같은 것을 정부대 정부의 입장에서 요청하면 할수록 우리는 한일간의 힘의 불균형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과거 냉전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세계의 심장부라고 하는 「유라시아」(E­urasia)의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중국이 비교적 취약한 상태에 놓여있고 「유라시아」의 주변세력인 일본이 막강한 힘을 소유하게 되었으며,과거에 「유라시아」 대륙세력에 대한 견제역할을 담당해온 미국은 경제문제로 허덕이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상황은 바로 고르바초프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부시의 아시아방문이 실패작으로 끝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미야자와의 방문을 기다리는 서울의 입장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즉 한편으로는 이른바 북방정책의 한계성을 부인할 수 없다면 또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우방 미국의 장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더욱이 일본의 태도에 대해서는 깊은 불신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민은 우리만의 고민은 아니다.

지난 1월7일 필자는 타임지가 주최한 아·태평양지역의 안보문제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했는데,우리지역의 다른 나라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아·태평양지역의 세력균형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대부분의 세미나 참석자들은 문제의 관건이 미국의 역할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이 소련위협이 사라졌다고 해서 아시아로부터 후퇴한다면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나라는 일본뿐인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본에 대한 아시아 지역국가들의 불신때문에 사태는 매우 불안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후퇴는 일본,중국,인도 등의 군비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미국의 역할은 계속 중요하다는 것이 전체적인 결론이었다. 문제는 미국국민도 우리와 생각이 같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세력균형을 기초로 하는 외교정책의 전통이 없는 나라다. 유럽이나 아시아의 국가들은 숙명적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역학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동서양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자체의 영토가 방대한 미국은 전쟁과 같은 비상시기에만 국제문제에 적극 개입하고 그런 위기가 지나가면 국내문제에 집중하는 고립주의 전통이 강하다. 따라서 냉전이 끝났으니까 더 이상 아시아지역에 깊이 빠져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점점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더욱이 경제가 어려운 만큼 고립주의 무드는 더 강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종지부를 찍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가정하에 대외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물론 지나친 속단이다.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냉전의 종식으로 미국의 역할문제가 새롭게 제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미국 역할의 종말을 예언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혼동하는 결과가 된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특정한 국가이익들을 추구하는 노력도 계속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정치적 독자성과 영토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지역세력 균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전략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주변세력 균형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책노력에 따라 변용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와 같은 관심과 우려를 가진 지역국가들과 폭넓고 차원높은 대화를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세력균형 구조가 안정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 우리가 추진해야할 아·태평양전략의 기본방향이라고 할수 있다.<사회과학원장·전 주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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