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책” 당시 일 교사가 찾아내/12세 5명등 10명 징발/지난해 방한,생존제자 1명 만나/자료검색땐 숫자 크게 늘어날듯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12∼14세의 나이어린 국민학교 여학생까지 근로정신대(정신대)로 끌고간 사실을 밝혀주는 학적부가 14일 서울의 두 국민학교에서 발견됐다.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사실이 확인된 사람은 경성부 제2부 공립국민학교 학생들로 서울 영희국교(강남구 일원동)가 보관중인 학적부의 6명,교동국교(종로구 경운동)가 보관중인 학적부의 4명 등 10명이다.
앞으로 일제시대부터 운영돼온 학교의 자료를 검색할 경우 정신대 피해여성은 훨씬 더 많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
▷영희국교◁
영희국교에서 발견된 학적부는 70년 폐교된 방산국교가 보관하던 것을 위탁관리해온 것으로 정신대 동원을 맡았던 44년당시의 6학년4반(여학생반) 담임교사인 이케다씨(지전정지·68·여·일본 생구시 거주)가 죄책감에서 수소문끝에 지난해 8월 찾아냈는데 75명의 학생중 6명을 정신대로 보낸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들 6명중 소화7년(32년)생인 5명은 44년 7월2일(당시 만 12세)에,소화6년(31년)생인 나머지 1명은 같은해 2월25일(당시 만 13세)에 「정신대 출발」로 적혀있으며 목적지는 일본 도야마(부산)의 「부이월정신대」로 돼있다.
32년 1월20일생인 양모양의 경우 본적이 경기 이천,보호자 직업이 공업으로 「정신대에 참가한 뒤에도 명랑하게 봉공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32년 10월22일생인 현모양은 본적이 경성부,보호자 직업이 목공업으로 「할머니와 어머니의 비상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정신대에 나갔으며,정신대에서도 생산성이 좋아 상장을 받았고 발육상태도 훨씬 더 좋아졌다」고 돼있다.
나머지 4명 역시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정신대에 나갔으며,정신대에 참가한 뒤로는 가족도 이들을 응원하고 있다」고 기록돼있다.
이케다씨는 지난해 영희국교를 방문,학적부가 자신의 기록임을 확인했는데 6명중 1명은 이미 사망했고 1명은 북한에 있으며 1명은 생사불명인 것도 알아냈다. 이케다씨는 생존자 3명중 이모씨(61)를 만나기까지 했다.
이케다씨는 당시 이씨에게 눈물로 참회하면서 속죄하는 심정으로 독신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케다씨는 특히 『담임반외에 고등과학생 14∼15명도 정신대로 동원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었다.
이케다씨는 최근 오사카(대판)에서 발행된 논문집 「개방교육」에 기고한 수기에서 『정신대 동원은 민간업자들의 소행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천황폐하의 명령」 바로 그것이었으며 실적이 좋은 교장은 영전되곤 했다』고 폭로했었다.
▷교동국교◁
정신대에 동원된 교동공립국민학교 고등과 학생 4명(당시 13세 2명 14세 2명)중 3명은 44년 7월1일 징용됐으며 나머지 1명은 종전 6개월전인 45년 2월25일 끌려갔는데 이들 4명 모두 도야마(부산)시의 부이월공장에 끌려갔다.
고등과 2년 백산동옥양(1930년 9월5일생·경성부 이청정 52)의 학적부엔 「소화19년(1944년) 7월1일부터 부산시 부이월 공장에 여자정신대원으로 출향했다」고 기록돼있다.
국교교사의 딸인 안전기선양(당시 14·경성부 성북정 183·27)과 대산신자양(1931년 2월17일생·경성부 이화정 24)도 같은날 정신대로 징용됐다.
그러나 김원남관양(1932년 2월8일생·성북정 128의2)은 다음해에 징용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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