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의 한맺힌 과거 털어놔/소송때 10여명 법정설듯태평양전쟁당시 일제에 의해 군인,군속,종군위안부로 징용된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측의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해온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회장 김종대)는 15일 종군위안부 3명 등 35명이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지난해 12월6일 동경지법에 제기한 이후 지금까지 5명이 유족회 사무실에 찾아오거나 전화로 자신들도 종군위안부로 동원됐던 사실을 신고해왔으며 이들 외에도 1∼2명이 더있어 설득여부에 따라서는 3월께부터 시작될 재판에 10여명이 증인으로 나가 증언하게 될 것같다고 밝혔다.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자신이 종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공개 또는 비공개적으로 밝힌 사람은 지난해 일본 오키나와에서 사망한 배봉기씨 등 해외거주자 2명 국내 8명 등 모두 10명이나 앞으로 피해당사자들의 신고 및 증언이 잇따를 것으로 전망했다.
대일소송이후 새로 나타난 피해자들도 대부분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 서울에 살고 있는 황모씨(호적나이 65세)는 18세때인 43년 가정형편이 어려워 함경남도 함흥에서 식모살이를 하던중 주인집 딸 대신에 방직공장 정신대로 동원됐다가 중국 길림성의 일본군 부대에 끌려가 부대를 따라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한것으로 드러났다.
황씨는 『일본 군인들은 부대가 이동하게 되면 많은 때는 20여명,적게는 5∼6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을 데리고 다녔다』며 『전투가 벌어져 군인들이 최전선으로 떠나는 날이면 으레 상대를 해야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해방됐다는 소식에 무작정 만주를 탈출,두달동안이나 걸어서 서울에 도착했었다.
또 12세때 동네어귀에서 소꿉장난을 하던중 이른바 「처녀 공출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대만까지 갔던 이옥분씨(66·부산거주)도 당시 일본군은 학교,사찰,민간주택 등을 징발해 보통 한곳에 20∼30명의 종군위안부를 몰아넣고 혹사시켰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매주 한차례씩 군의관들이 위안부들을 집합시켜놓고 606호라는 이름의 성병 예방주사를 놓았으며 성병에 걸리면 사람취급도 못받아 진주출신의 에이코라는 여자는 병에 걸리는 바람에 독방에 갇혀 매일같이 얻어맞다 죽었다』고 말했다.
대만남쪽 항구인 고웅시 인근의 군부대 위안소에 있었다는 이씨는 당시 일본군이 국민학교를 징발,모두 13개의 교실에 다다미를 깔아 설치한 임시위안소에 38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있었으며 1명이 10∼20명을 연달아 상대하다 지치면 다른 여자와 교대한후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생활이 계속됐었다고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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