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 최보가 난생 처음 조선땅 밖을 구경한 것은 나이 서른넷의 청년시절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백4년전,성종임금 19년때였다.최보는 경차관으로 제주섬에서 임무수행중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는 비보를 받고,나주로 돌아가다 폭풍을 만나 열흘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일행 40여명을 이끌고 바람에 밀려 당도한 곳은 중국땅 지금의 절강성 영가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새로운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방의 관헌들이 최보일행을 일본의 해적,다시 말해서 「왜구」로 의심해서 처형하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탄했다. 『차라리 바다위에서 죽는게 편했을걸…』
그가 남긴 「표해록」은 불과 34세의 청년이 조선의 지식인을 대표해서 당당하게 위기를 모면했던 극적인 과정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이 동양의 문명세계와 접촉을 가진 것은 극히 최근까지 왜구라는 해적활동을 통해서였다. 임진왜란은 말하자면 국가적 규모로 조직된 왜구활동이었다.
그만큼 일본사람들이 바다건너 문명권을 보는 심리는 독특하다. 지독한 사대주의에 문명권밖의 소위 「새외민족」으로서의 열등감과 소외감이다.
임진란때 참혹하게 쫓겨났던 일본은 20세기초 서양식무기를 들고와 역사상 처음으로 이 민족과 싸워 이겼다. 그뒤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들은 독특한 「왜구심리」에서 저지른 것이었다.
이들은 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양심이나 양식이 없었을뿐 아니라,멸시받아온 「숲속의 야인」으로서 잔인한 보복을 일삼았다.
그중에서도 「정신대」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만행이었다. 당한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고,저지른 왜구에게도 기억하고 싶지않은 치욕이었다.
문제는 일본이 아직도 「왜구심리」를 벗지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의 만행을 뉘우치기는 커녕,그들의 만행을 재현해서 독립기념관에 전시해 놓은 밀랍인형을 미야자와(궁택) 총리의 서울방문 이전에 치워달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문제는 있다. 재작년 5월 노태우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때 일본의 덴노(천황)는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무슨 암호같은 말을 했다. 이때 노태우대통령 정부는 그것이 「사과」라고 강조했다. 또 한·일 무역역조나 기술이전 문제가 타결된 것처럼 떠들썩했다.
그뒤 무역역조는 더 악화됐고,일본은 이제 겨우 「정신대」의 책임을 인정할 기색이다. 어느쪽 책임이 더 큰지 모를 일이다.<논설위원>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