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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동독민중혁명은 「슈타지」 작품”/독일 「디차이트」지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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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동독민중혁명은 「슈타지」 작품”/독일 「디차이트」지 보도

입력
1992.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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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곧 붕괴 미리알고 시민단체 지원·협조/KGB는 모른척… 과격행동 자제에 앞장서”【베를린=강병태특파원】 『동독체제를 붕괴시킨 89년 11월의 이른바 「민중혁명」은 악명 높은 동독정보기관 슈타지(국가보위부)가 주도한 작품이었다』

권위있는 주간 디 차이트지 최근호는 베를린 장벽붕괴를 전후해 진행된 일련의 사태를 종합분석,이같은 결론을 내놓았다.

디 차이트에 의하면 국내외 정보와 사회통제력을 장악했던 슈타지는 동독체제 붕괴가 임박했음도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이에따라 슈타지는 자신들과 동독지배 계층의 생존을 위협할 혁명적 사태를 막기위해 평화적 「민중혁명」을 조직,질서정연한 체제해체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동독체제 붕괴를 민주화 열망에 불타는 민중봉기의 소산으로 평가해온 시각에서 볼때 디 차이트의 결론은 실로 도전적 망발이다. 또 베를린 장벽붕괴가 공산당 대변인의 「발표실수」라는 이론을 믿는 이들로서는 상상력이 미치지 않는 추리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디 차이트의 결론은 「민중의 힘」만으론 설명되지 않던 동독체제 붕괴과정의 숱한 의문들을 해명해준다. 디 차이트는 스스로 『슈타지 작품론을 수긍할 수 없는 이는 정치적 상상력이 결핍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디 차이트는 『악명 높았던 슈타지도 역사의 흐름을 몰랐고,유리창 한장 깨지 않은 민중데모 앞에 무력했다』는 식의 일반적 인식이 착각임을 일깨우고 있다.

디 차이트에 의하면 불가피한 체제해체의 시점과 방법을 결정한 것도 슈타지였다.

서방세계는 슈타지를 국민을 공포로 억압하는 비밀경찰로만 묘사해 왔다. 그러나 실제 슈타지는 단순한 억압기관이 아니라 모든 국내외정보와 사회조직 통제력을 장악하고 있던 체제의 중추였다.

따라서 슈타지가 체제붕괴를 망연히 기다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슈타지는 무엇보다도 자신들과 동독지배 계층의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그것은 외국의 망명처나 서독의 수용소에서의 생존이 아닌,최대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슈타지가 교회 예술단체 등 모든 사회 조직에 침투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체제 시민운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동독체제에서 갑자기 숱한 시민운동이 대두한것은 바로 슈타지의 공작과 지원이 작용한 결과다.

디 차이트에 의하면 실제 교회 등 사회단체의 비판적 인물들중 다수가 슈타지로부터 『체제변혁을 위해 협조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동독의 마지막 총리인 드 메지에르 동독 기민당수 동독사민당 부의장 이브라힘 뵈메 등 시민운동의 지도급 협조자로 드러난 사실은 슈타지의 공직규모를 실증한다는 지적이다.

이들 슈타지가 포섭,발탁한 시민운동 지도자들은 민주적 전통이 없는 동독의 민중시위를 평화적으로 이끌어 동구 어느나라보다 질서정연한 혁명을 이루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베를린 장벽붕괴를 전후한 민중시위는 이들 시민운동뿐 아니라 슈타지가 직접 흐름을 주도했다. 최대 1백만명에 이른 시위군중들이 단 한차례도 과격행동이 없었던 「기적」은 슈타지 요원들이 대거 앞장서 자세와 질서를 외친 결과였다. 디 차이트에 앞서 이미 독일언론들은 슈타지 본부앞에서의 시위에도 슈타지 요원들이 섞여 과격화를 막는데 앞장 섰다고 전했었다.

슈타지가 체제해체의 시점을 결정했다는 디 차이트의 규정은 이미 베를린 장벽 붕괴와 관련한 비화로 확인됐었다.

서방일각에서 공산당 대변인의 「발표실수」로 희극화한 중앙위의 장벽여행 자유화 결정은 실제 슈타지 고위장성의 메모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대변인이었던 샤보프스키 자신의 증언이다. 그리고 이같은 슈타지의 체제해체 주도는 정보기관 특유의 속성상 KGB를 통한 소련과의 공조에 의한 것이라는 추정은 당초부터 있었다. 소련군과 동독군의 방관과 호네커의 소련행동 모든 주변상황도 슈타지와 소련의 공조없이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디 차이트의 「슈타지 작품론」도 결국 「민중혁명론」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뒤늦게 내놓은 「진상의 기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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