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씨는 역시 거물인 것 같다. 이제와서 그르 거물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지만 요즘 새삼 그런 생각을 하게된다. 최근 그의 언행에 따라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고 「역시 정주영이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그런 평가를 다시 되씹는 요즘이다.누가 뭐라해도 재계의 「황제」인 그에게 요즘이 아니라도 몇차례 놀란 일이 있다. 85년인가 현대자동차가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하려고 발버둥칠때였다. 일본에 들른 정씨는 동경의 한국 특파원들과 같이한 자리에서 『중동의 건설경기가 끝나가는 상황에서 우리경제의 살길은 자동차수출뿐인데 미국시장 개척보다 우리정부가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데 더 어려움이 있다』고 정부는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당시는 권위에 찬 5공 정부가 시퍼렇게 권력을 휘두르던때라 이러한 비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역시 정주영」이었다.
현대는 대미자동차 수출과 거의 때를 같이해 일본지사를 현지법인으로 승격시키고 동경제국호텔에서 대규모 축하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일본정·재계 거물들이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첨석했는데,이들은 명함을 손에 손에 들고 정씨와 인사한번 나누기 위해 수십미터씩 줄을 섰다. 가슴에 빨간 꽃을 꽂은 정씨는 자신에 찬 모습으로 이들의 인사와 명함을 받았다. 「역시 정주영」이란 생각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5공 청문회때도 마찬가지였다. 증인들을 죄인다루듯 몰아치던 국회의원들은 그에게만은 「증인님」,「회장님」하며 깍듯하게 대했다. 정시의 큰 그릇때문인지 돈의 위력때문인지는 몰라도 「역시 정주영」이었다.
「역시 정주영」이란 생각은 정씨가 91년 서울∼부산간 고속전철을 비판하고 정부의 세금추징에 『낼돈이 없다』고 거부하고 나섰을때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경유착이 당연시되던 때에 나온 고속전철 비판은 내막이야 어떻든 사람들의 눈을 다시 뜨게 했다.
세금거부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서민들은 무얼좀 하려해도 세무서 눈치를 보는데 그 은 세금을 추징을 당할때까지 내지않고도 끄떡없고 거부까지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역시 정주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정씨가 국민들에게 준 일련의 놀람·충격·감탄은 「경제인 정주영회장」으로서 한 일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가로서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역시 정주영」이란 놀라움 섞인 말로써 조금은 긍정적인 시각으로 봤는지도 모른다.
이같은 평가도 부족했는지 「경제인 정주영회장」이 이번엔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정치인 정주영씨」로 신분변경과 함게 그동안 대통령에게 가져다준 돈내역까지 밝혔다. 「역시 정주영」이란 예의 감탄(?)이 뒤따르는 모양이지만 뭐가 뭔지 머리속이 텅비는 기분이다.
솔직히 「경제인 정주영회장」하면 감칠 맛이 있다. 이에비해 「정치인 정주영씨」하면 어딘지 묘한 기분이 들고 오이먹다가 꽁지 씹는 맛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산에 오르다가 목이 탈때 먹는 오이맛은 그만이다. 버리기 아까워 꽁지까지 씹었다가는 전체의 맛이 달라진다. 오이꽁지에는 구크르비타신(Cucurbitacin)이란 탄수화물의 일종의 들어있어 쓴맛이 난다.
정씨가 어떤 연유에서 정치입문을 선언했는지 그 내막은 모르지만 국민은 그를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정씨는 국민이 있었기에 그가 제왕처럼 이끈 오늘의 현대그룹과 「경제인 정주영회장」이 존재할 수 있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욕심부터 오이꽁지까지 씹으면 전체의 맛이 써진다는 것을 항상 떠올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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