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세계적 지명도 조국혼란 수습에 유용”/“오랫동안 러시아서 일해” 일부 거부론【파리=김영환특파원】 감사후르디아가 물러난 그루지야에서 셰바르드나제 전 소련 외무장관은 정치생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오래 전 그루지야를 떠나 중앙무대에 봉사해온 셰바르드나제의 행로는 정부양면의 성격을 갖고 있어 예측을 어렵게 하나 그의 범세계적 지명도는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충분히 갖게하리라고 르몽드는 전망한다.
소련을 창건한 것은 스탈린이란 그루지야인이고 이를 파괴한 것은 셰바르드나제란 또 다른 그루지야인이다라고 한 사람이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그는 소련을 파괴하기전에 소련을 도왔으며 그루지야보다는 러시아에 더 봉사했다고 다른이가 반박한다. 그는 전세계에 알려진 그루지야 유일의 정치인이다라고 제3의 사람이 말한다. 그는 그루지야에 너무 많은 죄를 지어 그의 자리는 없다고 마지막 사람이 결론 내린다.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란 이름은 모든이의 입에 오르내린다.
일시적인지 모르나 작년 그루지야인 80%의 지지로 선출된 독재자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의 도주는 그루지야에 정치적 공백을 만들어 많은이들은 이제 셰바르드나제가 고향에 돌아올때가 오지 않았는가 자문한다.
그는 중재역을 위해 지난 12월23일 의회 벙커에서 버티는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에게 측근을 시켜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루지야 위기에서의 그의 역할을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독립국가공동체(CIS)가 협조이외의 기구를 갖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그의 정치적 장래는 그루지야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루지야인들이 그의 복귀에 동의할지는 두고 볼일이다. 감사후르디아의 실각이후 그의 만년 적수였던 셰바르드나제는 조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지켜온 침묵을 깼다. 그루지야는 국제원조기구의 창설,많은 선언들은 정치적 복귀를 기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수년간 세인들과 세바르드나제 자신은 그루지야에서의 그의 오랜 정치경력을 잊고 있었다.
그가 1928년 태어난 마마티란 마을은 그루지야 서부의 구리지방에 있으며 그 주민들은 정치에 대한 정열로 평판이 나 있었다.
구리의 농부 2명이 만나면 우선 미국 대통령의 건강소식이나 중국과 니카라과의 관계가 어떤가를 묻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셰바르드나제는 간호원 공부를 한뒤 트빌리시 공산당 청년동맹의 제1서기로서 고전적인 당간부의 길을 걸었다. 『그가 러시아어로 처음 연설했을때 그의 발음이 엉망이라 우리는 모두 웃었다』고 그의 지지자는 말한다.
내무장관을 거쳐 72년에 제1서기가된 그는 그루지야 경력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79년 4월말 수천명의 시민들이 러시아어를 소련의 공영어로 강제하려는 모스크바의 계획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셰바르드나제는 군중과 맞서 『최선을 다할테니 진정하라』고 말해 시위를 가라앉혔다. 결국 그루지야어는 그루지야에서 공용어로 유지됐으며 여기에는 셰바드나제의 공이 컸다.
고르바초프는 그들 외무장관으로 불렀고 그를 서방매체의 총아가 됐다. 그는 온 세계를 휘저었으나 트빌리시에서 자주 자기 않았다. 그루지야인들은 그러나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세바르드나제에개 자부심을 가졌다.
난제는 거기에 있다. 그루지야인들은 셰바르드나제를 좋아하건 않건 간에 그가 조국을 돕기위해 전세계와 맺고있는 관계를 자산으로 쓸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가 그루지야에서 당장 커다란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그에 대한 그루지야인들의 인상이 너무 나쁘다. 그는 먼저 자신이 소련보다는 그루지야를 선택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가령 유엔의 그루지야 대표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이후 그는 고위직책을 맡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는 트빌리시의 변호사도 있다. 『조국에 전념하기 위해 소련의 사망을 기다렸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셰바르드나제는 그루지야에 그의 몸을 바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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