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적 강압통치 이젠 국민이 용납안해「민족주의독재」라는 시대착오적인 강압통치를 고집하던 그루지야의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이 마침내 6일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로써 2백여명이 숨지고 4백여명이 다친 그루지야의 유혈사태는 당초의 우려보다는 적은 희생을 치르고 일단 수습됐다.
인구 5백40만명에 맛좋은 포도주와 과일로 유명한 그루지야의 앞날에 대해서는 아직도 낙관과 비관이 엇갈린다. 하지만 세계의 언론은 지금 감사후르디아라는 매우 독특한 독재자의 갑작스런 부상과 참담한 몰락속에 담긴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업에 관심을 쏟고 있다.
구 소련해체후 민중의 항거에 의해 축출된 최초의 공화국 지도자가 된 감사후르디아는 젊은날 공산당의 압제에 대항해 싸운 열렬한 민족주의 투사였다. 동시에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촉망받는 시인으로 세익스피어와 보들레르,휘트먼의 시를 그루지야말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브레즈네프치하인 70년대 정치범으로 정신병원에 3년 동안 감금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뒤 TV에 나와 자신의 과오를 참회하는 공개적인 변절을 통해 그 고초에서 벗어났다. 정치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던 그가 돌연 대중정치가로 두각을 나타내게된 배경은 아직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있다.
감사후르디아는 지난해 5월 87%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아 옐친보다는 한달앞서 구 소련 역사상 최초의 민선공화국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는 권좌에 오른 직후부터 숨겨온 독재성향을 드러냈다.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나를 비판하는 야당은 곧 나의 적』이라고 선언한 그는 반 정부지도자를 투옥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한편 민중의 시위를 무력으로 분쇄했다.
또 그루지야의 완전독립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루지야내 소수민족의 남오세티야주민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탄압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의 이같은 독선과 독단은 모두 그루지야 민족주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돼 있었지만 그것은 민주화라는 보다 강력한 시대의 대세에 역행하는 도그마였음이 입증됐다.
이제 감사후르디아의 실각은 옐친을 비롯한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즉 민주주의를 결하고 있는한 민족주의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주술로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구속에서 막 풀려난 구 소련민중을 옭아맬 수 없다는 경고이다.<김현수기자>김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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