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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도환」 사건/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 이력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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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도환」 사건/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 이력서:10)

입력
1992.0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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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서 압류… 선주 김용주 “날벼락”/박흥식 물건싣고 흥남 향해 출항/“친일파의 재산” 원산항서 발묶여/귀환노력도 허사… 정부수립후 대북교역 끝나1948년 6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두달 앞둔 어느날 화신산업 박흥식은 조선 우선 관리인인 김용주에게 배 한척을 부탁했다. 이 제안에 김용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면포와 전선 등 여러가지 상품을 싣고 떠날 배의 목적지가 다름아닌 이북이었기 때문이다.

박흥식의 설명은 이랬다. 『북한의 일방적인 단전으로 남한은 암흑으로 변했지만 경제교류만은 계속해야 한다. 미국의 대외 경제원조처인 ECA와 협의,면사 생고무 가솔린 등을 북으로 보내고 대신 남한에서 극심한 물자난을 빚고 있던 비료를 들여오기로 했다. 북한측과의 협의도 끝냈다』

남북한의 분단은 파행적인 두개의 경제권을 만들었다. 즉 전력 석탄 철광 등 주요 공업용 원료와 비료 및 중화학공업은 북한지역에 편재돼 있는 반면 남한에는 면방적과 생필품 등 경공업제품이 지배적이었다. 광복당시 북한이 전제 발전량의 98%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48년 5월14일 북한이 대남송전을 중단,남한지역 발전량으로는 일반 가정의 수요도 충당할 수 없었다. 전체 곡물생산량의 70%를 차지하던 남한의 곡물생산도 비료부족으로 격감했으며 인구의 급증으로 남한지역의 식량사정은 악화일로였다. 이 시기에 박흥식은 북한과의 교역을 계획했던 것이다.

김용주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북한이 송전을 중단하고 공산당과의 거래는 끝난 상태였다. 박흥식의 요청에 나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확답을 하루 미루고 미 군정청의 후신으로 정식출범전의 내각인 남조선 과도정부 당국에 의견을 묻는 한편 신뢰할 만한 중견사원 한명을 평양으로 파견,북괴정권의 무역대행기관인 조선상사와 접촉시켰다. 그 결과 북측은 선박 및 운항의 안전을 보장하는 협정서를 써줬다』

그러나 정부측에서는 다소 이견이 있었다. 당시 상공부장관이었던 임영신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했디. 『박흥식은 당시 자신의 계획을 이승만박사에게 밝히고 허락을 요청했다. 이 박사가 나를 불러 의견을 묻기에 나는 안된다고 말해다. 박 사장이 북한으로 실어보내겠다는 화물이 전략물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선박과 물건을 모두 뺏기고 비료도 절대 들여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박흥식의 북한산 비료 반입계획은 각의에 정식 안건으로 올라와 표결에 부쳐졌다. 표결결과 6대 5로 가결됐고 정부는 공식 허가서를 발급했다. 남북한간 경제교류를 지속해야 한다는 정부내 상당수 장관들의 생각과 박흥식의 장삿속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김용주의 선박 앵도환은 박흥식의 물건을 싣고 원산을 거쳐 흥남을 목적지로 떠났다. 그러나 배가 원산항에 정박하고 있을 때 제헌국회는 반민법을 통과시켰고 박흥식은 반민특위 제1호로 체포됐다. 기업인을 포함한 이른바 친일파에 대한 전면적인 체포가 시작됐던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북한측은 『박흥식은 친일파로 처단하게 됐으니 그같은 반동분자의 재산은 인민의 이름으로 압수해야 한다』며 앵도환을 압류했다. 북한이 남한의 대형 선박을 압류한 첫 케이스였다.

원인과 과정이야 어찌됐든 상공장관 임영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배는 물론 가져오겠다던 비료도 오지 않았다. 다급해진 것은 선박의 주인인 김용주였다. 그는 우선 선박반환과 억류선원의 귀환을 위해 평양행을 추진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몇달 후 북한측은 선원만 남한으로 돌려보냈다. 김용주는 홍콩과 정기항로를 교섭하기 위해 홍콩에 들렀을 때 마침 당시 앵도환의 안전을 보장해 준 북한의 조선상사 부사장 김정수가 그곳에 주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를 만나 앵도환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담배만 피우면서 듣고 있던 그는 동감이라고 말하면서 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앵도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입은 피해액이 수천만원에 이르렀으나 박흥식과 ECA는 끝내 피해액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임영신의 회고다.

이후 박흥식은 반민특위 1호로 잠시나마 감옥신세를 지게됐고,김용주는 배를 한 척 잃었으나 조선우선을 관리하던 경력을 인정받아 정부수립후 정식으로 조선우선을 불하받아 해운공사를 설립한 뒤 국내 최초의 선박회사 경영자로 활동하게 된다.

남한과 북한항을 오가는 선박은 앵도환이 마지막이었다. 남북한간에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정치적인 관계개선과 함께 기업인들의 남북한 경협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분위기가 조성되는대로 북한에 공장을 세우고 약초를 재배하겠다는 등 구체적인 계획들이 세워지고 있다.

이미 북한산 인삼주 등 일부 물자들이 백화점에서 전시·판매되는 등 남한으로 상당량 반입됐다. 앵도환을 끝으로 단절됐던 남북한간 직교역의 날도 멀지 않은 듯싶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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