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빌딩 구석 “독립선언” 비석만/중종때 공주위해 건립… 이완용도 기거/일제때 미 선교사 사들여 2층 한옥지어80년초부터 서울도심 곳곳에 불어닥친 재개발붐은 도시공간을 비교적 번듯하게 만들어 놓았으나 문화재급의 유서길은 「그때 그자리」를 아스팔트 밑에 파묻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 일대에 있던 「태화 기독교사회관」. 지금은 옛터에 초현대식으로 솟은 태화빌딩 12층에 사무실이 들어있는 이 사회관은 10여년전만 해도 이 일대 1천3백50평의 대지위에 연건평 6백70여평 규모로 지어진 고풍스런 석조 2층 한옥으로 3·1운동 등 파란만장한 근대민족사를 증언하고 있엇다.
그러나 개발바람으로 조선조부터 4백50여년의 역사를 간직해온 태화관 자리에 빌딩이 들어서면서 한 모퉁이에 「삼일독립선언 유적지」라는 비석만을 남겨놓았다.
태화관의 역사는 조선 중기부터 시작된다.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궁을 지어 순화궁이라 했다.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기전까지 기거하기도 했던 순화궁은 조선말기 안동김씨의 소유로 넘어가 태화정이 된뒤 금세기를 들어 몇차례 주인이 바뀌고 몸체가 두번이나 헐리는 수난을 겪었다.
조선왕조가 무너지면서 순화궁은 이완용의 손으로 넘어간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에 격분한 군중들이 이완용의 서대문 집을 불태워버리자 일본관헌은 이에게 순화궁을 내주었다.
1912년에는 당대의 최고요정 명월관이 이곳을 임대해 태화관이란 기생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7년뒤 민족대표 33인중 28명은 탑골공원과 가까운 태화관에 모여 3·1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 매국노 이완용이 5년간이나 살던 곳에서 독립선언문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21년 이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업을 하러온 미국 선교사들은 이완용에게 20만원을 주고 사들여 「태화여자관」이란 이름으로 개화 선교사업의 본거지로 삼았다.
39년에는 이 집을 허물고 당시로선 최신식 2층 석조한옥을 지어 문맹·질병퇴치와 선교활동을 병행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는 이 건물을 강제징발해 종로경찰서로 사용하면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고문,탄압의 상징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태화 기독교사회관 50년사는 「1943년 일제가 태화의 문을 닫고 종로서에 강제임대하니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됐다」고 적고 있다. 47년에 태화관을 되찾은 선교사들은 태화 기독교사회관으로 명칭을 바꾸어 전쟁후 문맹퇴치,정박아치료,빈민지역 개선사업 등을 본격적으로 하는한편 지역사회에 문호를 개방,60년대 이후에는 각종 사회활동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일제의 수탈과 억압,3·1독립운동의 발원지로 역사의 명암이 엇갈린 「태화관」 시대를 마감한 태화 기독교사회관은 다시 80년 「미국 감리교 세계선교부」로부터 독립,한국인들이 독자운영하는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으로 새출발했다.
태화빌딩은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의 법인체인 감리회 사회복지재단 소유로 연간 5억원의 사무실 임대료 등으로 사회복지사업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다.
지역복지,사회교육,정신건강사업을 3대 목표로 빈곤층의 어린이들과 결손가정의 불우청소년들을 감싸고 정신장애자돕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 김경희관장(43·여)은 『태화관은 일제하의 수난과 전쟁후의 궁핍을 견디어 낸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이었다』면서 『개화기의 상징적 건물이 도심 재개발에 밀려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하나님의 큰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태화의 정신은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샐러리맨들이 바삐 오가는 태화빌딩 입구 한쪽 구석에 세워진 비석에는 「이 집터는 조선조 중종이 지은 순화공주의 궁터로… 3·1독립운동때는 독립선언식이 거행됐고… 그러나 도심 재개발사업으로 건물이 헐리게 되어 새 집을 짓고 여기에 그 사연을 밝혀둔다」는 음각비문이 새겨져 「그때 그자리」를 증언해주고 있다.<이성철기자>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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