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무역상 전성시대/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9)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무역상 전성시대/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9)

입력
1992.01.06 00:00
0 0

◎김용주 첫 국적선 「앵도환」 홍콩취항/화신 박흥식 구미·아­아주까지 손길/이병철도 48년말 동참 사세 급신장/무역업 호황타고 조중훈은 운송재벌 토대구축47년 8월27일. 홍콩무역선인 아이비스호가 부산항에 입항했다. 한국과의 무역을 반대해오던 영국이 이를 정식 허가하면서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관허무역선이었다. 이를 계기로 마카오무역은 막을 내리고 홍콩무역시대가 열렸다.

사실 마카오무역과 홍콩무역은 영국이 한국과의 무역을 정식으로 허가했느냐 허거하지 않았느냐의 차이에 불과하고 실제거래된 상품은 마카오시대나 홍콩시대 모두 홍콩에서 선적한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영국의 홍콩정청은 뒤늦게 홍콩상품이 마카오를 거쳐 한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수출세라도 받는게 현명하다 싶어 이를 공식 허가했던 것이다.

마카오무역과 홍콩무역의 이같은 구분에 대해 당시 화업무역공사를 차려 크게 활약했던 김병환씨는 최근 다소 다른 내용의 증언을 했다. 『6·25 하루전날인 24일 마카오를 오가던 호북호에 1만2천달러어치의 오징어 해삼 마른새우 등을 실어 보냈다. 그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피난지인 부산에서 51년 8월 홍콩의 호북호 선주와 극적으로 연락이 닿았다. 이 선주는 6·25이전에 받은 금액만큼의 페니실린 마이신 등을 실어보내 마카오무역의 맥을 이었다』 따라서 그는 마카오무역을 50년 6월24일 호북호까지의 기간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비스호는 당시 한국의 무역항이었던 인천항 대신 거리가 가까운 부산항을 택해 입항,우리나라의 부산무역시대를 열었다.

마카오무역과 홍콩무역으로 우리나라의 대외무역이 본격화되자 정부는 조선환금은행을 설립하고 관세국을 신설하는 등 지원체제를 정비했다. 우리나라 국적의 무역선도 취항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한국무역선 앵도환. 47년 미 군정청으로부터 적산해운회사인 조선우선의 관리인으로 임명된 김용주가 식산은행에서 대부받은 5백만원으로 이 배를 수리,48년 4월에 처음으로 홍콩항로에 태극기를 달고 취항시킨 것이다. 앵도환은 한천을 싣고가 귀로에 생고무와 신문용지를 수입해왔다. 앵도환에 이어 김천호가 정기취항하면서 대외무역은 크게 활기를 띠었고 무역상들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정크무역시대부터 6·25이전까지 계속된 국내 초창기 무역업계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인 사람은 화신무역의 박흥식. 1939년 4월 화신무역을 설립한 박흥식은 독일인 길다일과 일본인 석천을 위탁고문으로 두고 구미와 아프리카 동남아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다. 중국 천진에는 사무소까지 내고 있었다. 『동남아시장에 운동화 해산물 의약품 사과 등을 거의 독점 수출했다. 남아프리카로는 양은식기를 수출했고 미국에는 명태 간유 등을 내다 팔았다. 1940년에 태국에 국산운동화 1백50만켤레를 수출,단일품목으로만 50여만원의 실적을 올렸다』 박흥식의 회고다. 일찍이 무역에 눈을 떴던 박흥식은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초창기 국내 무역업계를 선도해 나갔다.

태창직물의 백락승은 만주지역 직물수출을 독점하면서 일본의 마루베니 이토추 등 오늘날 세계적인 무역상사의 물건까지 태창직물을 거치도록 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종로상인 백윤수의 후예인 백낙승은 태평양전쟁 말기 관동군 사령부의 헌병대를 끼고 태창직물의 창구를 통해 포목을 만주로 밀수출하고 있었다. 백낙승은 포목밀수로 큰 돈을 벌어 해방후 국내 재계에 우뚝 솟은 기업인이 됐고 국내 최초의 재벌로 불리게 된다.

48년 11월 종로2가 영보빌딩 근처에 삼성물산공사를 차린 이병철은 조홍제전무 김생기상무와 함께 당시의 유행이었던 무역업에 투신했다.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에 오징어 한천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하는 것으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금세 확대되어 수입을 위주로 한취급상품은 철판 등 시설재와 재봉틀 실 바늘에 이르기까지 수백종에 달했다. 『수입한 상품은 일용잡화와 같은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통관되기가 무섭게 팔렸다. 상품의 발주에서 입하되기까지는 거의 2개월이 걸렸다. 설립 1년만에 외형 거래액이 등록된 무역업자 5백43명중 7위에 랭크됐다.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이듬해 6월에는 정부고관들도 타보지 못한 신형 시보레도 샀다』 이병철의 회고록은 당시의 무역업계가 얼마나 호황을 누렸나를 적고있다.

인천에 둥우리를 틀었던 조중훈은 45년 11월 트럭 한대로 시작한 운수업을 2년 뒤인 47년 10월에 화물차 15대로 늘릴 정도로 무역업의 호황과 함께 급부상,운송재벌로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밖에 동해안에는 김용주 김용성 형제가 경영하는 삼일상회가 포항에서 수산,해운,무역업을 하면서 천진 상해등지에 수산물을 수출했고 청진에서는 설경동(대한산업) 전택보(천우사) 조영일(대성산업) 등이 곡물류와 수산물을 만주와 중국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서선하 오천석 최태섭 박창익이 합자 설립한 삼흥실업은 마카오 홍콩등지에 수산물 광산물 돼지털을 수출하고 생고무 종이 면사를 수입했다. 김익균(건설실업) 김인형(동아상사) 등도 당시에 날리는 무역상이었으나 당삼수출에 실패하면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이종재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