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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소식/돈연 승려시인(종교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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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소식/돈연 승려시인(종교인 칼럼)

입력
1992.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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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사슴이 치달리던 부드러운 능선의 설원에 뿌려진 에메랄드빛 아침노을도 햇빛에 자리를 물려주고 떠났다. 작고 낮게 읊조리던 바람은 기지개를 켜 서서히 계곡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두타산의 북쪽 기슭,이곳은 눈이 많다. 겨울은 어김없이 눈이 쌓여 가슴까지 찬다. 이 때가 되면 새도 날기를 멈추고 짐승도 내닫기를 쉰다. 얼음밑으로 조용조용 흐르는 계곡의 물만 희미한 숨결로 남고,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나무 가지들이 뚝뚝 부러져 내린다. 가끔 바람이 불현듯 찾아와 눈보라를 휘날리기도 하지만 반백리 교통끊긴 이 산중은 적막의 장엄한 음악이 끝없이 퍼지고 있을 뿐이다.

가까운 이웃집과도 터널같은 눈길만 간신히 왕래할 뿐,눈이 녹아 땅이 밟히는 봄이 되기까지 이곳은 모두 선방 아닌 선방생활을 하게 된다. 겨울이면 눈에 갇힌 멧돼지 사냥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이곳 마을사람들도,20리 긴 계곡 어귀를 틀어막고 앉아버린 이 토굴 때문에 살생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마을이라지만 3∼4년전까지만 해도 12가구가 오붓하게 살았던 이곳이 다섯가구만 겨우 남아 힘겨운 품앗이로 농사를 짓고 있다. 해발 6백50m. 동으로 산 하나 넘으면 바다라서 안개와 비가 많다. 때문에 이곳은 고랭지 채소단지로 유명하다. 비탈진 밭 김매느라 엉덩이 찌그러졌다는 강원도 속담과는 달리 이곳의 밭들은 비교적 평탄해서 트랙터로 갈고 엎는다. 덥혀진 바다공기가 산들의 시원한 바람과 만나 비나 안개로 흩뿌리기 때문에 채소농사가 수월한 것이 이 산중의 장점. 그래서 해마다 채소농사로 적잖은 소득을 올려왔다. 그러나 채소값이 도무지 일정치 않고 중간상인들 재주 또한 코베어가는 인심이라 무 배추 심어 거덜난 집이 한두집 아니다. 한 두해 값이 좋으면 두세 해는 반드시 값이 폭락했다. 채소농사는 투기성이 매우 강했다. 농약도 빈번하게 사용해야 했다.

궁리끝에 우리는 콩을 심기로 했다. 콩을 수확하여 메주를 쑨다. 메주로 간장을 담근다. 맑고 깨끗한 물이 있으니 장 맛이 좋으리라는 생각에서 였다. 실험은 3년을 기한했다. 콩은 약간의 냉해가 있긴 했지만 수확은 평년작을 상회했다. 메주는 효소처리가 되어 날개돋친듯 팔렸다. 20개의 항아리에 시험으로 담은 간장은 서울·부산·대구·광주의 가정들로부터 맛이 좋다는 호응을 얻었다.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농산물개방의 우리마을 농사전략은 아직 1년의 시험기간을 남겨놓고 있다. 올해는 간장과 된장을 담는 그릇을 기존 생산품보다 더 좋게 디자인하고 판매망의 확보와 안정된 공급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점검하는 시험기간 3년의 마지막 단계이다. 콩은 농협에서 10만2천원에 사준다. 메주를 만들어 팔면 20만원을 받는다. 그러나 간장은 실험결과 6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콩보다는 6배의 값이다. 양조간장이 아니다. 순수한 재래식 간장 우리의 간장이다. 우리마을 농사개량 1차5개년이 끝나는 94년에는 우리마을의 농가소득이 우리나라 GNP의 2백%인 1만달러가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처음 이 계획을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별 뜬구름 잡는 스님도 있다는 표정들이었다. 2년이 지난 작년연말에는 금년에 지을 메주건조장의 환풍시설에 대해 서로가 머리 맞대고 진지하게 의논하게끔 되었다. 올해에는 농협의 융자,항아리의 주문,건조장건설,농약사용을 억제하기 위한 유기농업으로의 전환 등등 할일이 많다.

대지는 눈 속에 우리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60년대의 보릿고개를 우리의 지혜로 헤쳐나왔듯,거센 농산물개방의 물결을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리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도시는 농촌의 좋은 친구이다. 도시가 있기 때문에 농촌을 농산물을 판매할 수가 있다. 공해없고 질좋은 농산품의 생산은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적 사명이다.

막연히 정부에 기대지 맙시다. 스스로 합시다. 그냥 팔지 맙시다. 수확하고 다듬어서 가공합시다. 보기 좋고 맛있고 믿을만한 농산품을 우리 손으로 생산판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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