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후 3년7개월 기거… 임정공관역/미군 특수부대·월남대사등도 한때 주인서울 종로구 평동 108 고려병원 본관 2층 석조건물이 백범 김구선생이 광복조국에서 3년7개월 기거했던 경교장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않다.
해방직후 고국에 돌아온 임정인사를 비롯,정치지도자와 청년들로 연일 붐비며 임시정부의 공관역할을 했던 경교장은 지금은 하루 1천3백여명의 외래환자들이 드나드는 외래병동으로 바뀌었다. 이곳을 찾는 환자와 가족들도 이곳이 역사의 현장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많지 않다.
2층 석조건물로 된 경교장은 뒷벽을 헐고 5백여 병상이 들어찬 8층 병동과 연결돼 겉만 옛 모습일뿐 건물안과 주위 어느곳에서도 이곳이 백범의 거처였던 곳임을 알게해주는 안내표지판이나 사진 한장도 찾아볼 수 없다.
일제때인 38년 광산거부 최창학씨가 지은 경교장은 백범사후 자유중국대사관으로 잠시 사용되다 6·25때는 의료진 주둔지로,9·28수복 후에는 미군 특수부대가 주둔한 우리 현대사의 파란만장한 현장이었다.
경교장은 휴전후 월남대사관으로 쓰이다 지난 68년 현재의 고려병원이 인수,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교장은 당시 「조선과 건축」(제17집8호)이란 학술지에 소개될 정도로 미관이 뛰어난 건축물로 알려졌다.
경교장은 대지면적 1천5백84평,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2백64평으로 외부벽면은 화강암과 타일을 붙이고 지붕은 일본 궁성현산 천연슬레이트에 고기비늘형 덮개를 씌웠고 내부에는 현관을 비롯해 응접실 발코니 당구실 식당 이발실 서재 욕실 등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온수난방시설이 돼 있는 초호화저택이었다.
이 건물의 설계는 김세빈씨(?∼1975)가 했는데 그는 당시 총독부가 짓는 건물의 설계를 도맡아 할 정도로 한국인으로서는 구조계산의 1인자였다고 한다.
경교장은 원래 이름이 죽첨장이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이곳이 행정상으로 「경성부죽첨정 1정목 1번지」였기 때문이다. 백범이 지은 「경교장」이란 이름은 무악재에서부터 이 동네를 지나 한강으로 흐르는 개천위에 놓여진 다리 「경교」에서 따온 말이다.
백범은 45년 11월23일 임시국무위원들과 함께 상해를 떠나 27년만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온 후 경교장을 숙소로 정했다.
집주인 최씨는 임정귀국 환영위원회의 권유를 받아들여 백범에게 숙소로 내놓았다.
백범은 이곳에서 45년 12월3일 환국후 첫 국무회의를 소집했고 49년 4월19일 김일성과 통일문제를 논의키 위해 이곳을 출발,북으로 향했다.
49년 6월26일 낮12시36분께 백범은 경교장 2층거실에서 당시 육군소위 안두희의 저격을 받고 운명했다.
영결식이 열린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부터 장지인 효창공원에 이르기까지 길을 메운 인파가 선생의 죽음을 애도했다.
백범사후 43년이 지난 지금 경교장은 2층석조건물 겉모습만은 옛 그대로지만 건물내부와 주변은 병원용도에 맞게 많이 개조됐다.
백범이 거실로 사용하던 2층 왼쪽 방은 지금은 병원측이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백범의 손자 김진씨(44·사업)는 『옛날 경교장 앞에는 잔디밭과 정원이 있었고 정원앞쪽에 증조모(곽락원)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고 말했다.
『백범의 거처였던 병원 본관주변에 안내표지판을 설치하고 백범의 흉상이나 사진을 전시하는 문제를 검토했으나 여러가지 사정때문에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범 기념사업협회의 안윤기씨(65)는 『다른 나라의 예를 들지않더라도 역사를 소중히 하는 손길로 경교장을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광덕기자>김광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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