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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론/김창열 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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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론/김창열 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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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그가 무너뜨린 제정러시아를 「민족의 감옥」이라 불렀다. 그가 이끈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이면서 민족혁명이기도 했다. 대러시아 제국의 해체와 함께 여러민족 공화국이 분리·독립한 것이다. 초기 혁명정부가 직면한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이들 공화국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 세우느냐는 것이다.그러나 레닌의 혁명 프로그램에는 이 문제의 해답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가 떠받드는 마르크시즘이 민족이론을 빠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막연하게 공화국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소유즈(동맹·연방)를 생각했을 뿐이었다. 국호는 유럽·아시아 소비예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결국 문제의 해답은 민족문제 인민위원 스탈린이 내 놓았다. 그는 그 특유의 강권과 군사력마저 동원해서 소비예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만들어 낸다. 1922년 12월30일의 일이다. 이날 연설에서 스탈린은 「옛 러시아에 대한 새 러시아의 승리」를 선언했다. 러시아에 대한 소비예트의 승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해답은 분명한 오답이었다. 오늘의 소련사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카터 미 대통령의 안보 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의 말을 빌자면,그 오답이 만들어낸 것은 「민족의 감옥」을 대신하는 「민족의 공동묘지」였고,그 「민족의 공동묘지」는 다시 「민족의 분화구」로 변해 버렸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승리선언과는 달리,끝내 러시아가 소비예트를 이긴 것이다.

앞에서 본대로 스탈린은 레닌이 생각했던 국호에서 「유럽·아시아」라는 지명만을 지워버렸다. 하찮은 일 같지만 그 함축은 엄청나다.

그렇게 함으로써,고유명사가 하나도 없는 국호가 탄생했다. 「소비예트」의 어감이 고유명사 비슷하고,후에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기도 했으나,그것은 「협의회」를 뜻하는 보통 명사일뿐이다. 대개 국명에는 민족 이름이나 땅 이름이 붙게 마련인데 비추어 이처럼 보통명사만으로된 국호는 매우 특이하다.

그러면 이 보명명사 국호의 뜻을 무엇일까.

첫째 해답은 민족성의 부인이다. 레닌의 「유럽·아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민족」이란 함축을 지닌 것이지만,「유럽·아시아」를 지워버림으로써 민족이란 것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민족문제를 도외시했던 마르크시즘의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론이다.

이렇게 민족을 빼고,남는 것은 이데올로기,이념뿐이다. 소련 국호의 모든 보통명사가 특정한 이념을 대표한다.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소비예트」란 말도 그저 「협의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혁명의 기반인 노동자·농민·병사의 모임을 뜻한다. 망치와 낫과 별이 그 상징이다. 여기 1당 지배·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처럼 이념만으로 빚어 놓은 나라는 그 이념에 공명하는 모든 사람의 조국일 수가 있다. 어떤 나라든,민족을 초월해서,연방에 가입할 수도 있다. 해방직후 우리가 겪은 공산주의자들의 언동을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반면 이념만으로 빚어 놓은 나라는 그 이념과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다. 이념의 유효성이 부정될때,나라의 존재이유도 부정된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곧 「이데올로기 국가의 종언」인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함께 소련이 해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는 공화국들을 하나로 묶어 세울 새로운 이념의 모색과정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국호의 제안이 나온 것은 대안으로서의 이념제시가 여러 갈래였음을 말해준다.

그중에서 사하로프가 그의 헌법안에서 제시한 국호는 「유럽·아시아 사회주의 연합」이었다. 레닌으로의 회귀인 듯이 보이나,그보다는 느슨한 「연합」을 생각한 것이다. 솔제니친의 슬라브연방은 이른바 소러시아주의,그 다운 민족주의를 담고 있다.

반면에 고르바초프가 당초에 「소비예트주권 국가연방」을 제안한 것은 그가 충실한 공산주의자였고,새 집을 짓기 보다는 낡은 집을 고쳐 쓰려했음을 말해준다. 그의 신연방안은 결국 「주권국가연방」으로 낙착이 되지만,「소비예트」와 「사회주의」를 뺀 새 국호의 특징은 무이념 한마디로 요약된다. 새로운 이념창출에 실패했다는 고백이나 같다. 연방을 보전하려다 연방해체를 촉진한 고르바초프의 아이러니와 한계가 여기 있다. 지난 8월 「3일천하」의 아이러니도 꼭 그와 같다.

결국 소비예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라는 초이데올로기 국가의 잔해위에 지금 남은 것은 옐친의 「독립국가공동체」다. 역시 무이념이다. 나라도 아니다. 그것은 유럽공동체를 닮은 국제조직일 뿐이다. 유럽공동체를 가능케 했던 이념,유럽합중국을 바라보게 하는 그런 새로운 이념의 창출이 없다면,그 「독립국공동체」안에서 세포분열이 게속될 것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런 이념이 「실패한 신」 마르크스 언저리에 있지 않음은 더욱 틀림없다.

옛 사람들은 개관사정,관 뚜껑을 덮고 나야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판정할 수가 있다고 했다. 그처럼 지금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던 거대한 이데올로기 제국의 실체를 판단할 수가 있다.

이제 나흘뒤,91년을 마지막 보내는 날에,역사는 그 「마지막 제국」의 관 두껑울 덮는다. 꼭 69년 하루의 제국사는 그렇게 끝이 난다.

그 개관록을 쓰면서 생각하는 것은 일찍이 20세기 미국의 현인이라 불렸던 조지 케넌의 글 『소비예트 행태의 연원』이다. 케넌은 47년 「X」라는 가명으로 이 글을 발표,이른바 봉쇄정책을 제창했다. X논문으로 알려진 이 역사적인 글 첫머리는 『소비예트 권력은 이데올로기와 환경의 산물이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안에 「자기부패의 씨앗」이 들어있으며,「그 씨앗의 생장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그 결론이다. 소련 탄생의 비밀과 그 운명을 통찰한 예언이다.

45년을 지나서 그의 통찰이 옮았음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데올로기 국가는 자기부패로 쓰러지고 만다. 페레스트로이카만으로는 그 자괴를 박을 수가 없다.

그래서 91년 개관록의 눈길은 휴전선 너머에로 미칠 수 밖에 없다. 역사의 고아처럼 남아있는 주체의 초이데올로기 국가와 어찌 예외일 수 있을까.<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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