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인 1894년,양력으로 5월31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물밀듯이 전주에 입성했다. 이날 전봉준은 「호남 제1성」이라는 남문에 방문을 써붙여 천하에 군사를 일으킨 뜻을 밝혔다. 이 방문은 맨끝에서 이렇게 맺었다.『…가장 가석한 일은 3년 이내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므로 우리 동학이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함이니라』
그로부터 3년뒤인 1897년 2월28일자 독립협회보는 러시아의 군비확장·시베리아 철도건설·여순 해군기지 등 「남하정책」이 『우리나라의 숨은 근심거리(오속지은우)』라고 했다.
이듬해 황성신문은 열강을 등에 업고 뛰는 「자주성(항심)없는」 파당들을 지탄하면서 맨먼저 친로파인 「아당」을 꼽았다. 이어서 친미파 미당,친프랑스파 법당,친독일파 덕당,친일파 일당을 차례로 꼽았다(12월7일자).
그만큼 우리는 19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러시아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의 위협밑에 살아왔다. 공산당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러시아제국주의는 41년전 이땅에서 엄청난 유혈전쟁까지 벌였다.
그 소비예트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고르바초프는 『만일 가야한다면 당신은 가야만 한다. 이제 그럴 시간이 됐다』는 말과 함께 25일 저녁 크렘린을 떠났다. 88년 9월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유엔총회에서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선언했을 때만 해도 세계는 그뒤 2∼3년 사이에 밀어닥칠 역사의 전환을 짐작도 못했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러시아땅에서 정치권력의 전제를 해체하고,세계에는 화해와 평화에의 기대를 남기고 떠났다. 그러나 그 자신은 막강한 러시아제국의 유산상속인의 자리에서 영광된 개혁자의 특권을 누리려다 스스로 파놓은 개혁·개방의 함정에 빠져 밀려났다.
그런 뜻에서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제국의 「위대한 개혁자」요 「마지막 황제였다」고 기록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 민족과도 화해의 미소를 남기고 무대를 떠났다.
북한이 남북의 화해에 합의하고,핵무기개발 포기에 동의한 것도 고르바초프가 남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웃 러시아와 평화·선린을 기대하면서,동시에 한반도의 대결과 공포의 균형구조 청산을 기대한다.
우리는 북의 「김일성 주의」의 행방을 주시하면서,이제 눈을 안으로 돌려야 할 때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개혁과 새로운 안정을 달성해야 될 때다.<논설위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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