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개혁 주창 권력핵심 부상/경제난등 극복여부에 앞날 달려고르바초프 연방대통령의 사임으로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소련의 최고 실권자가 됐다. 형식상으로 그는 자신이 결성을 주도한 독립국가 공동체(Commonwealth of Inde pendent States)에 가입한 11개 소련 공화국 지도자의 한 사람이지만 공도체 인구의 55%와 면적의 76%를 차지하는 러시아공화국의 지도자인 그가 단지 「11분의 1」의 역할에 머무르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성기 시절 「슈퍼 차르」로 불렸던 고르바초프에 못지 않은 권력을 행사할 것이 거의 틀림없다.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임명됨으로써 최고권력의 자리에 올랐던데 비해 옐친은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했다. 사실 옐친은 탱크의 캐터필러에 깔려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슴 한구석에 안은채,쿠데타군의 탱크위에 올라가 시민봉기를 호소하는 사자후를 토했던 지난 8월19일 이미 최고권력을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지방 공산당의 지도자인 그를 일약 모스크바시 당 제1서기로 발탁한 인물은 다름아닌 고르바초프였다. 그러나 「8·19쿠데타」 실패후 이런 은혜에 대한 감사는 「수사학적인」 표현속에만 담았을뿐 정책적인 분야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공산 보수파의 쿠데타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가 『나는 사회주의자』라며 공산당을 존속시키고자 했을 때,그는 공산당 불법화로 이에 응수했고 이는 공산당의 해체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옐친의 상대적 부상으로만 여겼을 뿐 그가 고르바초프를 대체하기는 아직 시기 상조처럼 보였다. 국내에서의 인기가 비록 밑바닥을 헤매고는 있었지만 미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냉전을 종식시키고 동구를 해방시킨 고르바초프를 파트너로 생각했지 미지의 인물 옐친에게는 여전히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옐친의 러시아공화국이 12월8일 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과 함께 독립국가 공동체 결성을 선언함으로써 단번에 반전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물론 저항했다. 그러나 군부가 옐친진영으로 가담했다. 핵의 중앙통제문제 때문에 고르바초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미국마저도 옐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뒤에 진행된 사태는 일종의 끝내기 수순. 12월17일 고르바초프와 담판한 옐친은 기존의 「소비예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을 해체하기로 합의했고 21일 알마아타 협정을 통해 새로운 연방체의 탄생을 합법화 시켰다.
이처럼 고르바초프가 개혁주의자였다면 옐친은 혁명가였다. 고르바초프 못지않은 공산주의자였고 모스크바시 당 제1서기 당시만해도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그였지만 그것이 실현불가능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그는 주저없이 「과거」와 결별했다.
고르바초프의 사임으로 이제 소련이 겪고 있는 난제는 이제 옐친의 어깨위로 넘어왔다. 옐친은 과감한 가격자유화와 민영화 등 시장체제로의 전환에는 고르바초프보다 급진적이다. 그렇다고 고르비보다 경제적으로 급속한 「결과」를 얻어낸다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그가 기대하고 있는 「슬라브 민족주의」는 여타 공동체 가입 공화국으로부터 우려의 눈길을 받고 있고 군부의 지지는 아직까지는 확고하지 않다. 때문에 12월8일 독립국가 공동체 결성 이후 그가 거둔 성과는 오직 고르바초프부터 권력을 뺏은 것 뿐이라는 비평도 나오고 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뱀과 개구리가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고 비난했다. 옐친은 뱀인지 개구리인지는 모르나 소련의 미래를 위해 하나를 선택했으며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그것이 경제적 성공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왜 고르바초프가 뱀과 개구리가 함께 살려했는지를 깨닫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유동희기자>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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