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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 부의 틀마련 금의환향파도(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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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 부의 틀마련 금의환향파도(성장비화·부침야사 재벌이력서:6)

입력
199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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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식품공장 경영 유일한이 시발/김한수·이원만·김철호등은 일서 귀국/서갑호·신격호도 50·60년대 돌아와 한일양국서 명성어느날 물건을 가득 실은 트럭 한대가 미국 디트로이트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의 쇼윈도를 들이받았다. 백화점은 일시에 아수라장이 됐고 트럭에 실려있던 숙주나물 통조림은 천지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사건은 곧 지방신문에 대서 특필되고 흩어졌던 숙주나물 통조림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 사건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은 날개돋친 듯 팔렸다. 회사이름 「라쵸이」. 사장 유일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씨가 미국에서의 숙주나물 장사에 성공한 시발점이다. 이 사건은 유일한 자신이 아이디어를 낸 판촉전이었다.

구한말 개화파였던 부친의 주선으로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간 유일한은 미국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마친 뒤 「라쵸이식품」을 만들어 기발한 광고로 4년만에 50여만달러의 거금을 쥐고 귀국,유한양행을 설립했다. 1926년년 그의 나이 31세 때이다.

국내 재벌중 뚜렷한 또한 부류는 유일한씨 같은 경우다. 이른바 해외파. 이들은 일제시절 국내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일찌감치 해외로 눈을 돌렸다가 해외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한 뒤 고국에서 사업을 계속한다.

이들 해외파중 유일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본에서 활동했다. 이원만(코오롱),김철호(기아),서갑호(판본),신격호(롯데),김한수(한일합섬) 등이 일본에서 적지않은 돈을 벌어 귀국했다. 일찍이 예비재벌들이 진출한 곳은 만주와 일본이었으나 만주는 일제의 압정에 시달린 많은 우리 동포들이 정착하고 있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의 해외파 본거지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표적인 해외파 재벌 신격호. 그는 현재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두나라에서 재벌소리를 듣는 거부가 됐다. 그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21세되는 1941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었던 그의 당초 도일 목적은 못다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 도착한 신격호는 당시 고학을 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의 공식코스처럼 되어있던 우유배달과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끝에 그는 와세다대 이공학부에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첫 사업은 전공을 살린 화장품공장이었다. 그런대로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해방이 됐고 대부분 동포들이 귀국길에 올랐으나 그는 당초 목표를 실현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 당분간 일본에 계속 머물기로 결심했다. 신격호의 운명을 바꾼 것은 껌이다. 46년 미군진주와 함께 껌이 본격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껌장사로 큰 돈을 벌었다. 때마침 6·25가 터져 고국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귀국길을 미루던 그는 일본의 껌재벌로 명성을 굳힌 후 60년에 귀국했다.

코오롱그룹의 창업자인 이원만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29세인 1933년이다.

그도 역시 못다한 공부를 위해서 일본에 갔고 역시 신문을 배달했다. 『서러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나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의 조일신문에서 부수확장 표어를 모집했는데 내가 1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내용은 「친절과 노력은 확장의 어머니」였다. 그동안 신문배달의 체험을 글로 옮긴 것뿐이었는데 1등을 차지한 것이다』고 그는 회고했다.

그는 일본생활 2년만에 「욱공예」라는 모자공장을 차려 광고모자로 큰 재미를 봤다. 사업이 번창하던중 해방이 되자 공장을 동생인 원천에게 맡기고 고국에 돌아왔다. 1백80만원을 들고 귀국한 그는 이 돈으로 대구에서 경북기업이라는 섬유회사를 인수했다.

한일그룹의 김한수는 15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포목점에서 일하면서 섬유재벌을 꿈꿨고 아남그룹의 김향수도 한때 일본에서 무역업을 익힌 뒤 귀국,무역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김한수는 포목점에서 일하면서 지독하게 돈을 모아 사업자금을 만들었다. 5천원이 모아지고 학교도 졸업하게 되자 그는 직접 포목상을 열었다. 본거지인 대판뿐만 아니라 경도 신호등지를 돌며 주문을 소화할 정도로 번창했다. 1944년 그는 대판생활을 청산하고 도일 9년만에 모은 1만5천원을 움켜쥐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7세때 맨주먹으로 도일,기술을 익히고 한밑천 마련해 오는 김철호는 해방이 되자 귀국,서울에 경성기공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자전거 수리와 조립을 하면서 자동차 재벌의 꿈을 키웠다.

국내 재벌들의 초창기는 이처럼 다양하다.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밑자리를 깔은 예비재벌들은 해방후 혼란기에 무역업으로 서서히 세력을 키우고 기반을 다지면서 부상하게 된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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