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해외에 출장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가 푹 꺾인 채 돌아온다. 일본의 눈부신 변화를 보고 나서는 한때나마 가졌던 「20년 안에 우리도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아픔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한국의 상품은 지금 전세계에서 일본상품으로부터 수모를 겪고 있다. 컬러TV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고가제품시장에서는 일본산 제품이 월등한 기술력과 디자인으로 한국제품을 발도 못붙이게 하고 있고,중저가제품시장에서는 태국·말레이시아에서 생산된 일본 브랜드 제품이 저렴한 가격과 철저한 품질관리로 한국제품을 밀어내 버렸다.
일본은 왜 이렇게 강한가? 필자는 그 이유를 일본 기업의 경영전략에서 찾아본다. 앞에서 예로든 가전산업에서 일본기업이 추구하고 있는 경영전략은 이원화 전략과 다계화 전략이라는 두가지로 요약된다.
이원화 전략이란 독점적이고 첨단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가제품은 국내에서 생산하고,널리 보급된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중저가 제품은 해외에서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첨단기술은 국내에서 비밀을 보존하면서 그 수준을 계속 향상시켜 나가고,보편화된 기술은 해외시장으로 이전시켜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계화 전략이란 이원화 전략에 의해 해외에서 생산되는 중저가 제품의 공장을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계속 옮기는 것을 말한다. 일본은 50∼70년대에 국내임금이 상승하게 되자 중저가 제품의 조립공장을 홍콩·싱가포르·대만·한국으로 옮겨 생산을 계속했다. 그러나 70년대 말에 이르러 이들 네 나라가 일본기술을 이용해 상당한 생산력을 갖추게 되고 급기야는 가전품 생산규모에서 일본을 능가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게 되자,이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중저가 제품의 조립공장을 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산 입지 이동이 10년 정도 진행된 결과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선 한국·대만보다 훨씬 싸고,품질면에서도 앞서는 일본 상표가 부착된 가전제품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이나 대만의 도전을 허용하지 않았듯이,동남아 국가들이 한국·대만의 수준을 넘어서 일본의 경쟁국이 되는것 또한 용납치 않을 것이다. 말레이시아·태국의 가전업계가 한국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발전했을 때에 대비하여 일본은 이미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미얀마 등 인도차이나반도에 기반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일본 미쓰비시 상사의 어느 중역은 요즈음 일본 회사들이 베트남 열기(Vietnam Fever)로 들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바 있다. 이같이 일본 기업들은 아시아 어느 국가로부터도 일본에 대한 도전을 용납치 않으면서 이 지역의 종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 채 이대로 주저 않아야 하는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 우리에게 맞는 전략을 강구해야 할 때다. 이에 관련하여 필자는 다음 두가지 전략을 제안한다.
첫째는 전문화이다. 고가 첨단제품의 생산에 있어 우리기업을 위에서 내리 누르고 있는 일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술투자를 통해 제품개발 능력을 기르는 길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재벌기업이 그룹 차원에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국제적 수준에 오를 수 있는 부문을 대표선수로 내세워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만일 삼성그룹이나 럭키금성 그룹이 게열사의 모든 인력과 자금을 삼성전자와 금성사에 집중 투자한다면 10∼20년안으로 일본 가전회사들에 필적하는 수준의 기술과 제품을 갖게 되지 않겠는가?
두번째는 세계화이다. 동남아 지역을 생산 기지로 이용,저가 제품 시장에서 한국기업의 밑을 치고 들어오는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고단수의 세계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일본기업을 흉내내어 인도네시아,필리핀에 진출할 것이 아니라,이들 지역보다 원가가 더욱 낮은 베트남,캄보디아에 한발 앞서 진출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충남방적이 봉제공장으로,포항제철이 아연도판 합작공장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사례는 바로 이러한 전략과 일치한다. 그리고 몇년 후 이 지역에 일본기업들이 자리를 잡게 될 때 우리는 일본기업보다 먼저 스리랑카,방글라데시,파키스탄,인도 등의 서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에서 생산되는 더 값싼 제품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생산될 일본제품을 공략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전략이 소위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 전략인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일본이 엄청난 힘으로 우리 경제와 기업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좌절하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우리기업이 전문화를 통해 기술개발의 칼날을 세우고 세계평화를 통해 원가절감이라는 방패를 든다면,국제시장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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