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전에 차기대통령 후보를 선정하는 것과 총선후에 정하는 것과의 차이는 시차가 2개월 남짓하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야단들일까. 청와대쪽은 「2개월」을 앞당겨 줄 수 없다는 것이고,김영삼대표측은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양측은 그간 참모와 측근을 동원한 대리전 형식을 통해 이 「2개월 문제」를 물밑대화로 논의해왔으나 적절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고,그래서 직접 당사자들끼리 만나 결판을 내고 싶다는게 1월 담판설의 진상인 모양이다.○「불안」요인으로 전환
우리는 후보조기 가시화가 후반기 누수현상을 통제불능으로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는 위기인식이나,총선뒤에 정하겠다는 것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 후계구도에서 제외시키려는 음모라 주장 등에 대해 어느쪽이 옳은지 판단할 만큼 사정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 지난 4년 합당뒤 2년을 나름대로 잘 견뎌온 사람들이 갑자기 「2개월간」을 못참고 아우성을 치게 됐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화학적 융합을 해내지 못해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호불신이 문제이며,이제 정치불안을 없애기 위해 생긴 3당 합당이 정치불안의 주역이 될 것 같아 불안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다.
영국의 대처 전 수상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 여론을 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가 있다』고 말한바 있다. 여론과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경쟁하듯 능사로 해내는 이 나라 정치풍토에 대해 그처럼 경균이 넘치는 경구는 없다. 여론에 발빠르게 대응하거나 상황변화에 순발력 있게 적응해 나가는 임기응변력은 짧은 시간내에 화끈한 성과가 있어 좋다. 그러나 무엇인가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심모원려에는 취약하다. 상황주의의 정치는 상황의 변화에 강하나 원칙이 필요한 일엔 약하다. 지난 1주일 사이 통일정국의 선도가 떨어진 것도 말하자면 상황논리의 한계라 할 수 있다.
6공은 그간 상황주의의 편의성을 너무 즐겨온게 아닐까. 6공 정치에 있어서 원칙은 무엇이며 잘 정리가 돼 있는 것일까. 노태우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걱정한 것은 아마도 통치권의 누수현상이었는지 모른다. 5공때보다는 대통령의 권한이 약화됐고,5공때처럼 강권정치를 펼 의도가 없고 또 펼수도 없는데다가 군부 등 파워베이스를 충분하게 장악한 상태도 못되었던 만큼 폭발하는 민주화의 욕구와 열기를 바라보며 때로는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여소야대 국회에서 국가의 최고 운영권이 구조적으로 무력해질 수도 있음을 목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3당 합당은 대통령 자신에겐 정치적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몇차례의 위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또 경제정책의 실패라는 시행착오를 겪긴했어도 그럭저럭 취임 4년째를 견디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삼대표의 야당성이 정동성 결핍의 여당에 활기를 불어넣었고,그의 정치적 돌파력이 파행국회의 요인이 되긴 했으나 당정을 끌어가는 추진력이 되었으며,김종필 최고위원의 경륜과 균형감각이 또한 여당을 도왔음을 부인못할 것이다. 대통령은 특히 도전적인 김 대표를 길들이는 과정에서 채찍과 홍당무를 번갈아 사용하는 등 2중 플레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오히려 권력기반을 더 강화해갈 수 있었다. 결과가 말해주듯 대통령은 두 김씨에게 희생과 기여에 대한 보상을 해주어야할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논공행상의 일정대신 누수방지론이 때아니게 또 나왔다고 해서 김 대표측이 들고나서는 형국이 되었다. 수뇌부 사이에 원칙의 혼란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비민주성만 보여줘
6공은 정권창출을 위해 6·29정신이 필요했고 정치안정을 위해선 3당 합당을 필요로 했다. 당대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후일의 역사는 이둘을 6공의 2대지주였다고 기록할 것이다. 그 두지주를 부정한다는 것은 6공의 기반을 부정하는 말과 같다. 고향이 없는 나그네는 역사의 과객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공은 그 지주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 같다. 6·29 발상의 주체가 누구냐는 곁가지 폭로에 당황하고 있을뿐이다. 6·29가 누구의 발상이었는지 여부는 그렇게 중요한게 아니다.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국민앞에 선언하고 추진해간게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민주화의 실적을 얼마만큼 쌓았느냐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6공은 민주화를 한다면서 사상 최고의 날치기 국회를 만드는 역설적인 기록을 낳았고,후반기 누수대책에서 비민주성을 드러내지 않았던가. 6공은 끝까지 3당합당이 구국의 결단이었다는 자기선언을 실현시킬 역사적 책무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6공은 국민을 기만했다는 결론에 부딪치게 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정부가 북방외교에서 큰 업적을 쌓았음을 인정한다. 대소,대중국,대동구를 상대로한 역동적인 외교는 내치가 미약한 6공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남북합의서의 채택은 통일을 위한 정지작업으로서 역사적 평가를 누릴 수 있는 성질의 큰 성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6공의 치적에 불과할뿐 6공의 근본이 아니다. 본과 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3공의 경제성장을 이어받았던 5공은 물가를 한자리수로 잡으면서 내실을 다져 6공에 넘겼다. 우리가 누렸던 3년간의 흑자는 따지고보면 앞서 정권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6공은 기백억달러의 적자를 다음 정권에 넘기게 됐을 뿐이다. 냉전구조의 와해,남북화해 단계 진입이라는 현 국제정세속에서 남아있는 할일은 경제를 살리는 일이다. 이 과제는 민자당의 세식구가 똘똘 뭉친다해도 해내기가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계파이익에 혈안이 돼 싸우고만 있다. 표의 주인인 국민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말이다.<본사주필>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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