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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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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비화·부침야사(재벌이력서:5)

입력
1991.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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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지서 해보자” 지방고수파도 상당수/장경호·김지태등 부산거점 활동/조중훈도 인천에서 운송업 출발/금호 박인천 광주서 택시회사 차려 거부의 틀 마련해방은 초창기 재계의 인맥과 판도를 크게 뒤흔들었다. 각지에 흩어져 어설프게 기업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던 기업인들이 대이동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국내 재계사의 1차 부침이 일었다. 서울을 본거지로 하고 있던 민규식 김연수 박흥식 등 이름있는 기업인들이 침체기를 맞은 반면 만주 일본 등 해외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모여든 신흥 기업인들은 상대적으로 성장세를 보였다.

특히 이남에 둥우리를 틀었던 기업인들은 서울로 모여들기 보다 현지에서 오히려 더욱 활발한 활동을 폈다. 가장 많은 지방기업인들이 활동한 곳은 부산. 귀속재산을 불하받아 조선견직을 설립한 김지태,진주의 포목상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구인회를 비롯,장경호(동국제강),양태진(국제상사),정태성(성창),김인득(벽산),강석진(동명목재)씨 등이 부산을 본거지로 재벌의 대열에 올랐다.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을 열고 포목점을 운영하면서 운수업에도 손을 대고 있던 구인회는 해방이 되자 더 큰 무대를 부산으로 정했다. 부산에서 미군정청의 무역업 허가 1호로 기록되고 있는 조선흥업사라는 무역업 간판을 내건 것은 그의 나이 39세인 1945년 9월의 일이다. 이 간판으로 그가 맨처음 구상한 사업은 목탄업. 일본인들이 살던 다다미방 가옥에는 목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였다. 그러나 그는 숯을 구하러 떠난 대마도길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간신히 목숨만 구하고는 목탄업을 포기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아마쓰구리무. 부산의 흥아공업이라는 곳에서 만드는 이 크림을 들고 구인회는 동생들과 함께 서울을 오가면서 큰 밑천을 잡아 락희재벌로 크는 토대를 만들었다. 1969년까지 락희그룹의 본부는 부산이었다.

경남 함안 출신인 김인득의 부산시절은 다소 특이하다. 그는 해방직후 금융조합 등에서 봉급쟁이 생활을 하던 마산을 등지고 부산으로 가서 재일동포가 경영하던 동아극장의 지배인으로 변신했다. 오락시설이 거의 없던 당시의 극장 경기는 대단했다. 특별공연이나 영화상영의 날짜결정 등은 지배인의 권한이었다. 오늘날 벽산그룹의 출발은 흥행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난 90년 5·8 비업무용부동산 강제매각조치시 그가 마감시한까지 넘기면서 2천1백평의 동양영화 소유 부동산을 지켰던 것은 이같은 그의 애틋한 인연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동국제강의 장경호,국제상사의 양태진,성창그룹의 정태성 등은 부산에서 정미업을 했고,동명목재의 강석진은 당시에도 목재업을 했다.

이들 부산기업인과 달리 하나의 세를 형성하지는 못했으나 광주의 박인천(금호),인천의 조중훈(한진),대전의 최준문(동아) 등도 해방후 지방경제의 버팀목이었다. 천진 상해 홍콩등지를 돌며 마도로스의 꿈을 키우던 2등 기관사 조중훈은 해방후 트럭 한대를 구입하고 인천에 운송업겸 무역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가 바로 한진그룹의 모태인 한진상사. 기계를 아는 그는 헐값의 배와 트럭을 구입한 뒤 이를 수리하고 장비를 늘려가면서 사업을 넓혀 6·25 직전에는 트럭 30대,반선 10척에 달하는 상당한 부의 기반을 닦았다.

최준문은 당시 다른 기업인과는 달리 일찍부터 건설업에 눈을 돌려 해방되던 해 대전에 충남토건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일제시대 공사판의 십장노릇을 하면서 번 돈 5만원을 몽땅 털어 회사를 차린 것이다. 해방후 일감이 없어 쩔쩔매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현금결제를 철저히 지킨 그는 인부도 싸게,자재도 싸게 공급받는 특이한 경영방식으로 부의 틀을 만들었다.

광주의 박인천도 운수업으로 출발했다. 일제시대 그 어렵다던 보통문관시험에 합격,경찰간부까지 지낸 그는 해방직전 일제로부터 파면당하고는 광주에서 택시 2대로 광주택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돈냥있는 사업인,신혼부부 등으로 손님은 극히 제한되긴 했지만 이득은 엄청났다. 2년후 계산해 보니 창업비 40만원을 다 갚고도 이윤이 남았다. 당시 돈으로 택시 한대에 8만원이었는데 2년만에 2대를 증차,4대로 늘리고 곧 버스운수업에도 뛰어들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잠시 화제를 돌려보자. 오늘날 재벌의 대열에 올라 있는 기업인 중에는 박인천처럼 애당초 봉급쟁이였던 사람이 적지 않다. 진로그룹의 창업자인 장학엽은 일제시대 황해도 곡산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미원그룹의 임대홍도 교편을 잡았다. 또한 한국생사의 김지태는 동양척식,쌍용의 창업자인 김성곤은 상공은행,벽산의 김인득은 마산의 금융조합에 다니는 등 당초에는 금융계에 몸담았었던 기업인도 적지 않다. 일찍이 탈샐러리맨을 실천에 옮겨 성공한 것이다.

해방후 기업인들은 이처럼 경향각지의 각계각층에서 예비재벌로의 용트림을 하면서 거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이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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