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시절 함께한 분신”/산뜻한 새 지면에/남다른 감회 “흐뭇”29년만에 그 신문이 다시 온다. 54년 한국일보 창간이후 37년 동안 한국일보와 함께 살아온 창간독자에게 부활된 석간 한국일보는 긴 세월 헤어졌던 아들이 장성해 돌아오는 것처럼 반갑고 감회가 깊다.
농부 이영식씨(52·경기 양평군 지제면 송현1리 243)는 마지막 발행된 62년 6월29일자 석간 한국일보를 꺼내 시험제작한 새 석간 한국일보와 비교해보며 흐뭇해 했다. 빛바랜 62년의 눈이 아픈 작은 활자와 산뜻하고 경쾌한 91년의 컬러지면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이씨의 2층 다락방에 보관된 한국일보 1만3천여부 중에서 옛 석간을 찾아내는 일은 30여분이나 걸렸다.
통풍이 잘되도록 창문을 크게낸 3평 남짓한 다락방에는 5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한국일보가 5∼10년치씩 5개의 빌딩처럼 쌓여있다.
『1면 하단에는 「지평선」 대신 「메아리」가,사설은 왼쪽 상단에,오른쪽 밑에는 날씨가 있었지요』 오랜만에 옛 석간을 꺼내보면서 이씨는 어려웠던 그 시절을 돌이켰다.
이씨는 지금도 그 시절처럼 신문을 한달치씩 안방문갑에 모아 두었다 다락방에 올려 보관하고 있다. 가족 6명이 돌려보지만 귀퉁이 하나 찢어지는 법이 없다. 노모 임을남씨(77)는 눈이 어두운데도 한국일보를 다른 신문과 신통하게 구별하며 『애비가 아끼는 물건이니 소중히 다루라』고 손자 손녀에게 타이른다.
대지주였던 이씨의 집안은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이씨가 15세이던 54년 지금의 집터에 움막집을 지어 이사했다. 말에 풀을 먹이던 곳이라 역마을로 불렸던 송현리는 면사무소에만 신문이 배달됐었다.
면사무소 임시직원이었던 이씨의 형 영창씨(55·독일거주)가 여러사람이 보다 버린 한국일보를 한달치씩 집에 갖고 오면 5남대가 돌려가며 탐독했다.
형이 65년 2차 광원모집에 지원,서독으로 떠나자 면소재지에 있는 보급소에 구독을 신청했으나 배달은 국민학생이던 막내동생 영근씨(39·농협 근무)의 몫이 됐다. 왕복 10여리나 되는 먼길까지 동네의 유일한 독자를 위해 배달해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씨가 보관중인 당시의 한국일보에는 눈비라고 오면 젖을세라 옷속에 신문을 품고 돌아가는 소년을 위해 보급소장이 적은 「이영근」이라는 글씨가 생생히 남아 있다.
익숙치않은 노동이 힘겨워 『죽으면 뼈라도 추려 고향에 묻어달라』면서도 송금을 끊지 않던 형은 68년 1차 계약기간이 끝난 뒤 『빨리 자리를 잡으라』는 편지와 함께 목돈을 보내왔다.
이씨는 그돈으로 논 6마지기를 사들여 농군의 길을 택했다. 신문을 빠짐없이 보는 한 지식으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이씨는 전답 6천여평에 마을에서 처음 2층 양옥을 지은 부농으로 꼽힌다. 이씨가 신문을 빠짐없이 모은다는 소문이 퍼져 오래전 게재된 선친의 기사를 찾는 장거리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하고 있다. 이씨가 유일한 독자였던 송현1리에서는 70가구중 13가구가 한국일보를 본다.
『한국일보가 조·석간을 다시 시작한 것처럼 나도 더 일을 해야겠다』는 이씨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꿈이 두가지 남았다. 첫째는 모아온 한국일보를 모두 제본해 서가에 올리는 것이고 둘째는 88년부터 시작한 사슴농장이 좋은 성과를 거두어 입대중이거나 전문대에 다니는 성하,정하(22) 등 쌍둥이형제와 지하(15) 막내딸 수진(11) 이를 모두 대학에 보내는 것이다.<양평=유승우기자>양평=유승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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