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후 혹심한 용지난 불구 본격화/독자 호응속 「세계 최다부수」 이룩일본의 일간신문 발행부수는 경이적인 것이다. 요미우리(독매) 아사히(조일) 마이니치(매일) 니혼게이자이(일본경제) 등 4대 전국지는 모두 5백만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요미우리는 세계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한다.
90년판 기네스북에는 세계최대의 신문인 요미우리의 발행부수를 1천4백99만6천3백3부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89년 4월1일 현재 요미우리의 전국 4개 본사 17개 인쇄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조석간의 합계이다.
91년 10월 현재에는 이 신문의 발행부수는 1천5백만부가 되었다. 이중 조간이 9백75만7천7부,나머지 5백여만부는 석간이다.
아사히신문도 1천4백만부에 가깝고 마이니치는 6백여만부,니혼게이자이도 6백만부에 육박하고 있다.
일본신문이 이토록 경이적인 발행부수를 가진 것은 생래적으로 무언가 읽기를 좋아하는 일본국민들의 독서열 때문이기도 하지만,그 수요를 최대한 충족시켜 주려는 신문사의 경영전략이 크게 주효한 때문이다. 그것은 조석간 발행체제와 분산인쇄로 가능해졌다.
아무리 윤전기의 성능이 좋고 제작과정이 자동화됐다해도,그리고 수송수단이 발달했다고 해도 산간오지와 낙도지역에까지 신문을 제시간에 배달해주려면 전국 요소요소에 인쇄시설을 두지않고는 불가능하다. 또한 신문사가 조석간을 발행하지 않고서는 기네스북에 오를 기록을 세울 수 없다.
일본신문들의 조석간발행 역사는 오래다. 메이지(명치)시대 초반기에 창간된 일본신문들이 최초의 석간발행 경쟁시대를 맞은 것은 메이지 10년(1877년)의 일이다. 동경일일신문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을 나누어 발행한 것을 처음으로,우편보지 동경조일 등이 뒤따라 석간을 발행했다.
그러나 이때의 신문은 아직 근대적인 체제를 갖추지 못해 발행부수도 지면도 형식뿐인 석간이었다.
본격적인 조석간시대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한 1945년 이후의 일이다. 군국주의시대의 퇴장으로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없어지자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혹심한 물자부족으로 인한 용지난이었다.
1949년 고베(신호) 신문이 재생지를 사용해 조석간을 발행한 것이 제2기 조석간시대의 출발이었다.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등 중앙전국지들도 같은해 조석간 발행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셍카지」 시대의 서비스경쟁이었다. 셍카지란 폐지에 약간의 펄프를 넣어 만든 재생지여서 지질은 형편없었으나 정부의 입김이 없어진 신문에 호감을 갖게된 독자들은 이 서비스를 크게 환영,조석간체제의 정착이 가능했다. 1950년 7월현재의 일간지 총 발행부수가 2천7백19만1천7백54부(일본신문협회 통계)로 전년보다 34%나 늘었다. 이 가운데 석간이 8백9만9천7백81부나 된것만 보아도 독자들이 석간발행을 얼마나 반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대신문사들이 오늘날 연간 매상고 4천억엔이 넘는 큰 기업으로 성장한 것은 고난의 시대에도 독자들의 앞서가는 정보욕구를 충족시켜 준 반대급부라 할 수 있다. 90년 4월부터 91년 3월말까지의 요미우리신문 매상고는 4천3백29억엔이다. 전체종업원수는 8천91명,이 가운데 편집부문만 3천4백26명이다. 지방도시 취재요원은 9백39명이나 되고 전세계 36개 도시에 56명의 특파원을 두고 있다.
아사히신문의 동기간 매상고는 4천56억엔,종업원수는 8천4백49명. 이중 편집부문이 2천9백33명,해외특파원상주도시 36개소이다.
세계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외형에 부끄럽지않은 진용을 갖추게된 것은 물론 조석간발행 40여년간 축적된 노력의 결실이다.<동경=문창재특파원>동경=문창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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