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연구는 내 소꿉동무,40여년만의 해후 이뤄질지…”/가족처럼 정답던 10여년 이웃… 47년 월북패션유학길로 “긴 이별”남북 여성토론회에 참가하기 위해 25일 서울에 오는 북한대표 여연구씨(64)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여 대표와 어린시절 서울 종로구 계동의 아래윗집에 살면서 10여년간 함께 뛰놀았던 디자이너 노라노씨(63·본명 노명자)도 40여년만에 어릴적 소꿉동무를 만나게 될지 몰라 가슴설레고 있다.
7∼8세 무렵에 동무가 된 이후 17세때 노씨네가 이사가기까지 두 집안은 한가족처럼 정답게 살았다. 여 대표의 선친 몽양 여운형씨와 노씨의 선친도 친구사이였고 여 대표네 5남매(위로 두형제는 일찍 사망)와 노씨네 9남매는 서로 엇비슷하게 나이가 맞아 또래 친구였다.
『잠자고 학교갔다오는 시간만 빼고 노상 붙어다니다시피했지요. 소학교시절 여름방학때는 새벽5시만 되면 그 집앞에 가서 소리를 질렀죠. 「연구야 나와라 놀자」 그러면 몽양이 「연구야 명자가 부른다. 일어나라」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매일 그러는데도 몽양은 한번도 야단치지않고 늘 저를 예뻐해 주셨지요』
이들은 옆에 있던 휘문중학교의 담을 넘어가 철봉대위를 걸어다니거나 책을 갖고가 공부도 했다.
소학교 5∼6학년 무렵에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어서 아이들도 전쟁놀이에 열심이었다. 두집안 아이들은 편을 갈라 놀이를 했는데 유난히 활달했던 노씨와 연구씨가 늘 대장노릇을 했고 남동생은 병정,여동생은 간호사였다.
노씨는 몽양을 대단한 멋쟁이로 기억한다. 『여름에 두집 식구들이 삼청동 야외수영장에 놀러갈 때마다 몽양은 흰모자에 사파리,반바지,스타킹,구두까지 온통 하얗게 차려입고 다니셨죠. 얼마나 멋지던지 「연구는 저런 아버지가 있어서 참 좋겠다」고 부러워 했어요. 그분은 당신 무릎에 날 앉히고 귀를 후벼주시곤 했는데 그럴때 나는 머리를 기댄채 올려다보며 「내가 크면 꼭 이런 남자랑 결혼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노씨가 경기여고 4학년때 경기고 학생이 쓴 글을 『못썼다』고 비편한게 말썽이 되어 경기고 학생들이 「건방진 여학생」을 잡으러왔다. 그때 노씨는 연구씨 집에 놀러가 있다가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듣고 나갔는데 『명자가 맞으러 간다』는 연구의 말을 들은 몽양은 맨발로 뛰어나가 남학생들의 멱살을 잡아 끌고와 사과를 하게 했다.
『해방될 때까지 연구가 좌익에 기울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고 그러리라는 느낌도 전혀 못받았어요. 「빨갱이」에 대한 핍박이 심해지고 몽양이 암살되면서부터 연구는 운명적으로 그쪽으로 쏠려가게 된거라고 짐작될 뿐이지요』
두 친구의 절친한 인연은 해방되면서 노씨네가 이사를 하는 바람에 끊어졌다.
47년 연구씨는 월북하고 노씨는 패션공부를 하러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어 6·25가 났고 남북이 갈라져 두 친구는 영영 만날 수 없게 됐다.
빡빡한 행사일정상 이들 소꿉동무가 이번에 만나기는 어려울 것같다. 최근 북한을 왕래하는 교포로부터 여씨가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리를 전해듣긴 했지만 노씨는 어렸을적 마음이 남아있을지 궁금해하고 있다. 분단의 골은 두 소꿉동무 사이에도 어쩔 수 없이 금을 긋고 있다.<오미환기자>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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