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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입술」/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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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입술」/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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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떤 시골역­. 열차를 기다리다 심심해진 두 소녀가 대합실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직업 알아맞히기를 시작했다. 저 사람은 농부,저 사람은 상점주인,이렇게 재잘대고 있는데,한 중년신사가 나타났다. 두 소녀의 관찰이 엇갈렸다. 『회사원이 틀림없어』 『아니야,공무원일꺼야』 소녀들 앞을 지나다 말고,그 신사가 한마디 했다. 『아가씨들,두분 다 틀렸습니다. 나는 농아학교의 독순술 선생입니다』독순술이란,농아자들을 위한 언어교육법의 한 가지로,상대방 입술의 움직임과 모양,얼굴표정을 보아 남의 말을 알아내는 기법이다. 그런 독순술의 선생이라면,말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도 사람들이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볼수가 있다.

영국 왕실의 어떤 신혼부부가 궁전 발코니에 나와 축하군중에게 답례했다. 그 며칠뒤 부부의 몸가짐을 나무라는 독자투고가 신문에 실렸다. 텔레비전에서,웃음 띤 얼굴로 손을 흔드는 그들 부부의 입을 보니 『이젠 그만 하지…』하고 짜증을 내고 있더라는 내용이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이따금 앞의 조크와 에피소드를 떠 올린다. 예컨대 매주 한번 텔레비전 뉴스의 단골 메뉴처럼 나오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의 주례회동 장면이다. 같은 방,같은 자리,대좌의 포맷은 언제나 같은데,두 사람이 늘 웃고만 있다. 무슨 말을 주고 받길래­ 싶어진다. 그럴때 독순술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른바 여·야 영수의 청와대 회동이 있을때도 생각은 마찬가지다.

독순술은 영어의 Lip­reading(입술 읽기)을 한역한 말이다. 그러나 영어의 『입술을 읽는다』는 좀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내 입술을 읽어 주세요』(Read my lips)라고 할때,그 뜻은 『내 말을 믿어 주세요』 『내 말에 틀림이 없습니다』가 된다.

이 『내 입술을 읽어 주세요』는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을 야유하는 미국신문 만화나 칼럼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한다. 지난번 대통령 선거때,부시후보가 이 말을 자주썼기 때문이다. 그가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미국 영어교사협회의 90년도 「일구이언상」까지 받았음을 비꼬느라,「부시의 입술」 「대통령의 입술」을 들먹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입술을 읽어주세요』는,지난번 대선때,노후보가 썼던 『이 사람을 믿어 주세요』와 상통한다. 그가 중문평가 공약을 회피했을때,그의 관용구를 떠올렸던 사정도 비슷한 것 아닌가 한다.

요즘처럼 세상 돌아감새가 불투명할수록,사람들은 「대통령의 입술」을 쳐다보게 마련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내년 한해 4차례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치일정 논의가 있다. 순하게 4차례 선거를 다 치르자니 경제가 결딴날 것이라 야단이고,그래서 나온 동시선거 주장에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는 선거의 동시관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답한 물음 끝에,정부·여당은 일부 선거의 연기를 꾀하고 있다는 「설」마저 분분하게 나돈다. 딱하긴 하지만,이 매듭을 재단할 권능이 어디 있는지를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은 눈길이 「대통령의 입술」 한 곳으로 쏠린다.

이에 대하여 대통령은 법대로 선거를 치를 것이며,그 경우에도 동시선거는 반대한다는 뜻을 여러차례 밝혀 온 것으로 전해진다. 「돈 안드는 선거」만 이룩된다면 한해 4차례 선거를 치를만 하다는 것이다. 이를 부연하여 대통령은 지난 11일 정치인들이 기업을 향해 손을 벌리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강조하고,그런 행위를 단속하도록 비서관들에게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좀 안된 말이지만,대통령의 그 같은 소신 표명을 전해듣고,이제 내년 정치일정이 투명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지난 11일 언급에서 대통령은 나도 대선·총선을 치러봤지만,기업에 돈을 요구한 적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중앙일보 11·11). 「대통령의 입술」을 쳐다 보던 많은 사람이 적어도 이 보도에 대해서만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 같다. 그러면서 5공청산 무렵의 텔레비전 화면을 떠올린 사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중의 한 장면은 정주영씨가 일해재단 청문회에서 권력과 기업관계의 「시류론」을 펴던 장면이다. 그때 문답을 한 대목만 옮기면 이렇다.

­정치자금을 얼마나 냈는가.

『요구가 있을 때마다 내라는 만큼 다 냈다』

또 다른 장면은 백담사 은둔을 밝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이다. 그는 고뇌에 찬 모습으로 사유재산 모두와 함께 「여당 총재로서 관리하다 남은 돈 1백39억원」을 헌납한다고 밝혔었다. 쉽게 말하면 대선을 치르고 남은 돈이다. 그 돈을 기업에 요구한 사람이 있었을 것도 틀림없다.

사람의 말은 고무풍선과 같아서 바늘구멍 하나만으로도 모든 김이 샌다. 대통령이 한 말의 바른 전언이든 와전이든,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말 몇마디가 그 천금의 무게를 몽땅 사라지게 한다. 정치일정에 대한 대통령의 소언을 간간이 전해 들으면서도 전망이 트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까닭은 이런데도 있다.

또 한가지 더 분명한 것은 토막토막 전해지는 대통령의 편언만으로는 인심을 안정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정부·여당 안에서 조차 대통령의 「의중」을 궁금해하는 판국이라,일반 국민으로서는 「대통령의 입술」을 읽는 독순술이 아니라,「대통령의 마음」을 읽은 독심술마저 아쉬워질 지경이다. 이것이 요즘 불안정의 가장 큰 요인이다.

그러니,이제는 대통령이 분명하게 말을 하고,분명한 의지를 밝혀야 한다. 그리하여 바늘구멍 같은 의아심도 없도록 해야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안정을 찾고,그래야만 새해 가파른 정치고개를 탈없이 넘을 수가 있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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