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는 한국에서 적어도 3천년전,어쩌면 4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을 갖고 있다. 경기도 흠암리에서 나온 탄화미는 최소한 기원전 7세기 이전,경기도 여주에서 나온것은 3천년전,일산의 가화리에서는 4천년전것도 나왔다. 그러나 물이 그득한 논에서 버를 기르는 논농사의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삼국시대만해도 논농사는 백제지역에서 한반도 중부까지 올라온데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에서는 여전히 좁쌀이나 기장 같은 밭곡식 농사를 지었다. 그나마 한해 농사를 지은 논은 이듬해,또는 2년동안 쉬어야 다음해에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소위 「휴경」이다. 해마다 논농사가 가능해진 것은 고려말 이었다 한다. ◆벼는 한국사람을 먹여 살렸을뿐 아니라,비·바람과 추위·더위를 피하는 안식처를 주었다. 볏짚으로 이은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은 모은 한국인의 고향이었다. 볏짚은 겨울엔 따뜻한 솜이불과 같고,여름이면 훌륭한 단열재 구실을 했다. 이 민족의 대부분은 그속에서 출생해서 그속에서 눈을 감았다. ◆뿐만 아니다. 거친 볏짚은 오만가지 연장과 생활의 이기가 됐다. 짚신이나 섬 또는 멍석처럼 굵은 올로 엮은것도 있고,등구미나 종다래끼처럼 정교한 그릇도 만들었다. 장대한 새끼줄은 공동체의 축제때 고싸움의 주역이었고,금줄은 액막이 구실을 하는 신성불가침의 상징이었다.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짚문화 특별전」(16일까지)은 모든 한국인의 가슴속에 숨겨진 고향을 복원해 놓은 것 같다. 더구나 쌀시장 개방문제로 위기의 그림자가 덮치고 있는때라 더욱 감회가 깊다. 한국인에게 벼농사는 「경제」를 뛰어넘어 바로 생존 그 자체다. 호락호락 쌀시장을 내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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