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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비극 이긴다”/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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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비극 이긴다”/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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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3일)부터 7일까지 닷새동안,91년도 나관리세미나가 서울에서 열린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원하고,보건사회부가 주관하는 이 세미나에는,WHO관계관 등 외국인 전문가 29명이 참가하지만,이 모임의 또 다른 주인은 세미나의 명예대회장인 유준박사(75·전 영남대 총장)라고 할 수가 있다. 나병의학의 세계적 권위로서,「나환자의 대부」로 평생을 살아온 유 박사는,6일에 있을 명예대회장 초청만찬에서,지난 50년에 걸친 나병 퇴치사업의 체험을 피력하고,그 50년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작정이다.『이 자리에 모이신 국내외 전문가 여러분,한국은 2차대전후 가장 열악한 환경에 있었으나,한 세대가 다가기전에,7백년 이상 묵은 나병의 비극에서 해방되었음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그것은 나병으로부터의 「해방선언」인 동시에,지금껏 나병문제를 해결 못한 여러나라들,그리고 2천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전세계 나환자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문헌에 나병에 관한 기록이 보이기는 1251년의 「향약구급방」이 처음이다. 1445년 세종임금때는 나환자 치료를 위한 구료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나병에 관한 자세한 증상을 적고,치료제로 대풍나무 열매의 기름(대풍자유)를 들었다. 요즘 베스트셀러인 「소설 동의보감」은 그 무렵 나환자들의 참상과 나병치료를 위한 피어린 노력이 있었음을 소상이 그리고 있다. 이것이 유 박사가 말하는 「7백년 비극」이란 표현의 말뜻이다.

현대의학이 들어온 뒤에도,나병의 비국은 그침이 없었다. 소록도에 환자 6천명을 강제격리하는 세계 최대의 요양소가 있어야 했고,숨어 지내는 사람까지 합치면 그 환자수가 10만명은 될것이라고 했던것이다. 해방과 6·25의 혼란을 겪으면서는,이들이 유랑·걸식하는 처지에 몰려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뒤 30여년의 나관리 사업이 이 양상을 바꾸어 놓았다. 통계를 보면,작년의 새 환자 발생은 1백57명에 그쳤다. 인구 10만명당 0.36명,이 수치는 WHO의 나병 근절판정기준(10만명당 1명)을 82년이래 줄곧 밑돌고 있다. 또 작년 현재의 활동성 환자는 1천3백41명으로 인구 1만명당 0.38명 꼴이다. 이 역시 80년이래로,WHO기준(인구 1만명당 1명)을 밑도는 수치다. 나병 등록환자의 누계가 아직은 2만3천명에 이르고 있으나,활동성 환자를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가 한때 나병을 앓은 병력자일 뿐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나관리 사업은 이들의 재활과 복지로 중점을 옮길 단계가 된것이다. 이들의 완전한 사회복귀를 위한 더많은 복지투자가 새로운 과제로 등장한다.

이것이 유 박사가 선포하는 「해방선언」의 뜻이다. 새로운 과제풀이를 위한 도전이며,남은 과제마저 다 푼뒤의 「제2해방선언」을 기약함이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것은 유 박사야말로 그런 「선언」의 최적임자라는 것이다.

유 박사가 나병문제에 신명을 바친지는 올로써 50년이 된다. 대학 재학중 나병문제에 눈을 뜬 그는 졸업하자마자 소록도로 간다. 그 곳에서 그는,유학을 떠나기까지 1년미만 사이 6백여명의 환자가 죽어나가는 참상을 본다. 그는 그중 4백명을 부검하며,연구에 몰두했다.

공부를 마친 뒤 그가 펼친 사업은 어떻게 보면,그가 몸소 겪고 본 「소록도 방식」과의 싸움이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다. 환자의 마구잡이 강제수용만으로는 나병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신념을 실천하는것이 그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그같은 유 박사의 나병퇴치 철학은 「3재활」 한마디로 설명이 된다. 무엇보다 먼저 「정신의 재활」이 있어야 하고,「육신의 재활」 「사회·경제적 재활」이 있고서야 나병대책은 완벽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환자들에게 삶의 의욕을 일깨우고,병을 고친뒤에는 이들을 사회로 완전 복귀시키자는 것이다. 그 바탕은 자기희생적인 인간애요,그 구체적인 방안이 희망촌,지금의 정착촌 사업이다.

유 박사가 남다른 것은 이 이상을 곧장 실천에 옮긴 열정과 뚝심에 있다. 나환자 조직의 「왕초」들과 인간적인 교분을 트던 일,거지대장과 손잡고 여고생들과 함께 가두모금을 하던일,나환자 수백명을 이끌고 산등성이에 첫 희망촌 삽질을 하던 일,여기서 뭉둥이를 든 주민들에게 쫓겨 나던일,자리를 옮겨 희망촌을 다시짓던 일 등은 한편의 의협소설처럼 극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지은 희망촌이 47년이래 16곳이나 되었으나,이들 모두가 6·25전쟁 틈에 무로 돌아갔다.

실망속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유 박사는 57년 새 포부를 안고 귀국한다. 그의 귀국 제1성인측 『나병은 낫는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연구와 치료제(DDS)의 개발을 보고 그런 확신을 얻은 것이다. 『나병은 낫는다』는 것이 그때로서는 좀 엉뚱하게 들리는 말이었지만,나환자들에게는 다시 없는 복음이었다. 그 감격을,나환자 시인 한하운(75년 작고)은 『이땅에서/그 못쓸 나병이 낫는다는/듣도 보도 못한/신화를…』이라 읊었다. 유 박사는 나환자 6천명을 몸소 진료함으로써 이 「신화」를 사실로 증명했다. 「3재활」의 모든 고리가 완성된 셈이었다.

유 박사가 다시 시작한 희망촌은 지금 정부가 지원하는 정착촌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국 98개 정착촌은 나환자 8천여명과 그 가족 등 2만3천여명의 보금자리로 자리를 잡았다. 어떤곳은 중소기업 단지로 발돋움 했다. 정착촌은 기피의 대상이 아니라 일반 주민들의 일터로 된것이다.

지난 50년을 돌아보며,유 박사는 이런말을 한다. 그 사이 우리나라 나관리 사업에 성과가 있었다면,그것은 『환자들 스스로 고통을 이겨낸 용기와 투쟁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설계를 펼쳐보인다. 하나는 못다한 나병연구를 계속하는 것이고,다음은 「7백년 비극」을 이겨낸 한국모델로서 우리보다 못한 나라를 돕는 일이다. 한국모델을 통한 온 세계의 나병근절,「나병으로부터의 인류 해방선언」이,지금 8순을 바라보는 노석학의 더 큰 「야심」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 성취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는 것이,이제 선진국 진열에 들어서는 우리나라 나관리사업의,또하나 새로운 과제가 아닐까 한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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