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합의서 형식과 명칭을 정하는 첫번째의 가시적 결실을 남기고 끝났다. 양측이 남북한간 합의서를 단일문건으로 하고 그 명칭과 형식에 관해 의견일치를 보면서 내용은 금후 실무접촉을 통해 협의 해결토록 한 것은 회담직전까지만 해도 기대하기 어려웠던 일들이다.오늘날 우리의 외적 통일환경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나아가서 한반도 통일문제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주변 4강만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남북간의 직접대화로 한반도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랄만큼 개선되었다.
북한은 그동안 주변환경변화에 따라 어쩔수 없이 대화에 임하는 듯한 인상을 비쳐왔다. 세차례에 걸친 회담이후 군사훈련의 핑계와 콜레라를 구실로 회담을 연기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그러나 금후 실무회담 과정에서 토의될 합의서의 내용을 생각할 때 문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번 회담에서 북측이 그들의 기본태도를 바꾼 것이라고 보기는 아직 이르기 때문이다. 이제껏 북측은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중시하는 우리측의 합의문안이 흡수통일을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정치군사 문제의 선결주장을 앞세우고 있는 북한의 입장을 우리는 미군철수를 비롯한 남조선혁명 논리로 보아왔다.
이번 4차회담은 지난 9월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후 처음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기대를 모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은 긴급의제라는 이름으로 핵문제를 들고나와 미군철수 문제와 본격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어느때라도 회담의 장애요인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놓았으며 앞으로의 회담진척에서도 또다른 장애로 활용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북한은 왜 목소리를 높여 통일을 외치면서도 회담에 이같은 지뢰를 매설하고 있는가. 대외적으로는 유연한 노선을 걸으면서 왜 대남정책에 있어서만은 이같은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북한은 지금 외부세계의 급변으로 인한 개방과 개혁의 압력을 받으면서 동시에 체제유지를 위한 내부단속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적 갈등을 겪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지배체제는 이같은 외압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국가들은 혁명전통과 개혁전통,경제발전의 수준,서방세계와의 협력관계,사회적 다원화 등의 변수에 따라 여러가지 변화양상을 보여왔다. 중국과 같은 경제에 한정된 개방,소련과 같은 위로부터의 급진적 개혁,루마니아와 같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의한 해체붕괴 등의 경우가 그것들이다. 그러나 북한은 주체사상을 유일의 지도이념으로 삼고 수령과 당과 대중이 삼위일체가 된 국가체제와 자급자족의 폐쇄경제체제로 사회전체를 하나의 「병영」으로 만들어 놓고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하면서 남북한 분단의 특수상황을 이용한 냉전이데올로기 강화를 통해 정치·군사적 대결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사회주의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같은 점들은 이제껏 북한의 체제관리에는 강점이 되어온 반면,그들 체제의 개혁과 개방에는 역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의 저해요인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촉진요인들도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국제환경변화에 대응하는 문제,파탄직전에 놓여있는 경제위기의 대처문제,유엔동시가입에 따른 남북관계 개선압력 등이다.
오늘의 북한이 직면한 교조주의체제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이같은 요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남조선 해방이라는 혁명논리에서 연유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북한의 변화는 이같은 혁명의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고 그 해방은 북한이 교조적 주체사상과 김일성 유일지도체제,폐쇄적인 대외정책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이같은 근본적 변화를 당장 북한으로부터 기대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북한은 외부의 충격이나 압력을 극도로 제한하여 수용하는데 국한함으로써 그들 주체형 사회주의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대응하여 왔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북한의 변화가 불가피하고 그 시기가 점차 다가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폭넓은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문제는 단기적으로 북한 체제의 변화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점과,있다면 그 시기가 언제쯤 될 것이냐 하는 점,그리고 변화의 촉진요인과 억제요인이 복합작용을 하는 가운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점 등이다.
우선 체제개혁에 있어서는 현재 북한 내부에서도 실용주의적 사고가 싹트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획일적 통제체제하에서 주체사상을 부정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부의 출현이 단시일내에 조직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현체제를 유지하면서 위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이 시도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다음으로 국제적 고립과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대일,대미접근에 전력을 경주할 것이다. 최근 UNDP가 중심이 된 삼각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두만강 개발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끝으로 남북대화와 남북관계 개선은 대외정책과 표리관계에 있는 만큼 형식적으로나마 추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지만,그들의 기본정책이 변하지 않는한 생산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북한의 이중정책 즉,선전차원의 평화공세와 전복차원의 통일전선 전술이라는 전략적 이중성의 수명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 수명은 90년대 중반기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때 남북관계가 실제로 통일에 좀더 접근하는 방향으로 조정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더 필요할 것이다. 북한은 지금 외부정세 변화에 따른 개혁의 가능성 여부를 탐색하는 시험적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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