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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춘 본지 북한부장의 북녘 3박4일(평양,91년 가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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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춘 본지 북한부장의 북녘 3박4일(평양,91년 가을:중)

입력
1991.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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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변」의 연속/어딜가나 “말좀 묻갔시오” 포위/임수경·통일등 판박은듯 외쳐평양은 남측 대표단에 조직적으로 「봉변」을 주는 것 같았다. 백화점,상점,길거리 등을 가리지 않고 『말좀 물어보갔시오』 『한마디 묻갔시오』라고 시작되면 그 자리에 있는 대표단 일행은 「봉변」을 모면할 방도가 없게 된다. 제1백화점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기위해 기다리는 동안 50대 여인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차』했지만 이미 늦었다. 으레 『말좀 물어보갔시오』가 들려왔다. 『나는 잘 모르갔시오. 뒤에 오는 사람이 잘아니 물어보시오』라고 얼핏 응답하면서 「도망」치듯 에스컬레이터를 타자 『담화를 왜 하지 않으려느냐』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백화점내에 진열된 상품에 대해 물어보기만해도 「봉변」이 따르기 때문에 진열대 옆에 다가가지도 않고 슬슬 돌아다니다 아예 구경을 포기하고 내려오는데 청색 교복차림의 학생들이 우리측 기자몇명을 둘러싸고 있는것이 보였다. 김일성 종합대학생들이었다. 예의를 내 팽개친 학생들은 『서울지역 대학생기자들이 북조선에 오겠다는 것을 왜 막느냐』고 시비를 걸었고 우리 기자들이 대답하자 논전이 시작됐다. 이들은 상대방의 주장이나 설명은 처음부터 듣지않고 대사를 외우는듯 했다.

기자들은 빠져 나오고 싶어도 학생들과 상품구입을 하지않고 몰려든 백화점 손님들에게 「포위」 당해 20여분간 그야말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위생실(화장실)까지 졸졸 따라 다니던 안내원들도 기자가 「봉변」을 당하기만 하면 귀신처럼 사라졌다가 「봉변」에서 벗어나면 싱글거리며 나타났다.

평양의 「봉변」 주기는 식당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단 숙소인 백화원초대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그날 당한 「봉변」을 동료들과 얘기하다 또 「봉변」을 당했다. 6·25당시 북측 종군기자로 입북하지 않고 빨치산투쟁중 잡혀 구속됐다가 풀려난후 다시 간첩활동으로 몇차례 투옥됐던 리인모씨 때문이었다. 리씨는 끝내 전향하지 않아 형기를 모두 마치고 석방돼 북조선에서는 「공산주의를 수호한 영웅」으로 「조직선전」된 인물.

동료기자와 리인모씨에 대한 얘기도중 식사를 날라주던 20대 초반의 웨이터가 『한마디 묻갔시오』라며 다가섰다. 수저를 든채 쳐다보자 『왜 리인모노인을 북조선에 보내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으나 이 청년은 듣지도 않고 「인도주의」 「인도주의」만을 연발했다.

기자가 당한 최대의 「봉변」은 고위급회담장인 인민문화궁전 길건너편에 있는 식품점에서 였다. 24일 상오 2차 비공개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동료기자 1명과 함께 슬그머니 인민문화궁전을 나서 지하도로 들어섰다. 통상적으론 기자의 단독취재를 결사저지하던 안내원이 『안되오』라면서도 기자의 뒤를 따라오는 모양새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칠수가 없었다. 길건너편에서 목표물을 삼았던 식품점에 들어섰다.

「보통문식료품 상점」이란 조잡한 간판이 붙은 식품점에는 4명의 여자판매원이 5명의 30∼40대 여자들과 함께 물건을 사지도 팔지도 않으며 「대기중」이었다. 이 정도의 숫자라면 「자신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 결과적으로 엄청난 착오였다. 유리로된 판매대안에 진열돼 있는 처음보는 식품들의 이름을 물어보다 순대가 보여 『이건 순대로군』하고 말한 것이 「봉변」의 시발이었다.

한 여자판매원이 『순대를 아는 것을 보니 같은 민족이구먼. 물어보갔시오』하는 순간 기자는 또다시 귀가 멍해져야했다.

10평 정도의 점포내에는 어느 순간에 30여명의 남녀노소가 몰려들어 녹음된 소리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분씩 얘기하시오』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30여명은 목소리 경쟁을 하듯 리인모,임수경,통일,미군 철수 등을 순서도 말한마디도 틀리지 않고 외쳐댔다.

모두가 입에 녹음기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악머구리 같았다. 기자가 빠져 나오려하자 이들은 문을 가로막고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도망」했지만 한 여인은 지하도 입구까지 따라왔다. 이 모든 장면을 북한의 보도일꾼들은 TV카메라로 잡아내며 싱글거렸다.

이렇듯 기자에게 「봉변」을 준 평양시민들은 철저한 학습을 거쳐 「조직동원」된 사람들. 기자가 운좋게 「조직」되지 않은 시민을 만나 한마디라도 물어보려면 어느새 보도일꾼의 TV카메라는 강력한 플래시를 시민에게 쏘아대는 것을 신호로 『위대한 수령님께서…』가 시작됐다.

기자는 「봉변」을 당했지만 이에 대한 적합한 어휘를 처음에는 찾지 못했다. 공식 만찬장에서 옆에 앉은 평양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말했더니 『봉변당하셨구먼요』라고 말해 「아 이것이 봉변이구나」 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봉변당한 것을 위로하던 지도급인사들도 「한마디 묻갔시오」를 결코 빠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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