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진지한 눈”/김창열칼럼(토요세평)

알림

“진지한 눈”/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10.26 00:00
0 0

『그 전쟁의 기억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일본을 방문중인 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은 23일 아키히토(명인) 일왕이 베푼 만찬 답사에서 이렇게 따끔한 말을 했다. 여왕은 태평양전쟁중 일본이 점령했던 구식민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군민 10만명이 억류당했고,그로 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음을 숫자까지 들어 가면서 언급하고,『다음 세대들은 그런 과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장래를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왕의 말은 일본신문들의 표현대로,과연 이례적이다. 일왕의 만찬사가,「참으로 불행했던 일」이라고 지난 전쟁을 가볍게 언급했던 것과 대조가 된다. 일왕의 인사말은 7분에 끝났으나 여왕의 답사는 16분이 걸렸다. 일왕궁에 초대된 국빈치고,그처럼 솔직하게 구체적으로 일본의 과거를 지적한 예는 일찍이 없었다. 일본 사람들이 당혹했을 것은 당연하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는 4백년 가깝다. 16세기 서세동점의 선두였던 네덜란드는 일찍이 일본과 교역을 텄고,도쿠가와(덕천) 3백년의 쇄국시대에도 네덜란드만은 일본과의 왕래가 허용됐다. 말하자면 네덜란드는 일본에 서양문명을 소개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뒤의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반일감정이 가장 드센 나라로 꼽힌다. 전쟁중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군민 1만5천명이 희생당한 원한이 뿌리 깊은 탓이다. 그 때문에 71년 유럽을 순방한 당시의 히로히토 일왕은 네덜란드에서 투석과 데모를 당했다. 80년에 즉위한 베아트릭스 여왕은 87년 일본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반일여론에 밀려 이를 취소해야 했고,그 2년뒤 히로히토국상 때는 왕실의 조문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이같은 우여곡절의 바닥에는 전쟁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문제가 깔려 있다. 법적으로만 따진다면,네덜란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전쟁배상 청구권을 포기했고,일본은 이를 받아 1천만달러의 위로금을 지급하여,모든 문제는 결착이난 꼴이다. 하지만 바로 당자인 전쟁피해자들은 이를 납득하지 않는다. 그들중 7천8백명은 따로 모임을 만들어,한 사람당 2만달러씩의 배상금을 일본에게 물리도록 유엔에 제소해 놓고 있다. 그들의 대표는 여왕과 때를 맞추어 일본을 방문해서 활동중이다.

좀 장황한 듯하게 네덜란드와 일본의 관계를 옮겨 적는데는 까닭이 없지 않다. 그 기본도식이 일본에 대한 우리의 처지를 새삼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왕 면전에서 여왕이 한 말을 십이분 공감한다. 그 말에서 분명한 교훈을 얻는다. 그것은 피해자로서의 몸 가짐이다. 할 말은 한다는 떳떳함이다.

여왕의 만찬 답사에는 이런 말도 들어 있다.

『과거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고통스런 체험을 진지한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울분과 원한으로 가득한 마음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말은 결코 가해자를 향한 타이름일 수만은 없다. 「진지한 눈」은 피해자 스스로에게도 있어야 한다. 할말은 해야 한다는 뜻이 이것이다. 분풀이,한 풀이를 넘어 선 교훈이다.

이런 말들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 어떠할지를 우리는 쉽게 짐작한다. 「불행했던 일」 「과거는 이미 법적·정치적 결착을 보았다」는 지금까지의 수사와 태도를 되풀이하리란 것이다. 가해자 일본의 몸가짐이 그 선을 넘어설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 오히려 전쟁의 피해자임을 자처하면서 보여준 일본 사람들의 몸가짐이다.

그 하나의 사례가 일본의 대소태도이다. 지난 여름 고르바초프 방일을 앞두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직후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일본군 문제를 제기,억류중 사망자의 명단을 요구했다. 일본의 경제협력이 아쉬웠던 소련은 사망자 3만8천여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일본정부는 곧 5백72군데로 알려진 묘지에서 이들 유골을 수습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태평양전쟁의 해외전몰자 2백40만명중 1백22만명의 유골을 수습한 일본이라,시베리아 유골수습에도 많은 정력을 쏟을 것이 틀림없다. 남은 것은 사망자에 대한 배상인데,일본정부는 이들의 배상청구권이 지금도 유효함을 밝히고 있다. 언젠가 이 문제는 두 나라의 외교문제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피해자 일본」의 교훈은 진주만 기습직후 미국정부가 일본계 시민을 수용소에 억류했던 일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대응이다. 이들은 끈질긴 배상운동을 펴,88년에 억류자 6만명이 한 사람 2만달러씩의 배상을 받아냈다. 공직에서 해고됐던 3백여명은 부당해고 1년에 1천2백50달러씩의 배상을 탔다. 두 경우 모두 꾸준한 운동과 의회의 특별입법으로 가능했다.

베아트릭스 여왕과 일왕이 보여준 피해자와 가해자의 도식,그리고 「피해자 일본」의 두가지 사례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과연 우리에게 역사를 보는 「진지한 눈」이 있는가.

작년 노태우대통령 방일때,우리정부는 강제 징용자의 명단을 넘겨주도록 일본측에 요구했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는 지난 3월 9만8백4명의 명단을 보내왔다. 이것이 최고 1백50만명으로까지 추산되는 징용자 실수에 크게 못미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더 큰 문제는 이 명단을 공개조차 않는 정부의 태도다. 어디에서도 역사를 보는 「진지한 눈」을 찾기가 어렵다.

그 한편에서,강제 징용자,태평양전쟁 전사자 유족 등의 민간단체들은,오히려 일본인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배상청구소송을 일본법정에 제기하고 있다. 이들 33개 단체가 모여,지난 18일 「대일본 침략청산청구한민족회」를 결성했다고 하지만,힘이 벅찰 것은 틀림이 없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것이 정부의 미심한 태도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배상은 65년 한일협정으로 끝났다고 해도,민간인의 배상청구권을 다시 외교현안으로 제기해야 마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법정의 소송절차나 법의 형식논리로 풀 수 없는 현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진지한 눈」이 있다면,그 것이 당연한 과제인 것 역시 분명하다. 민간단체들의 대일배상청구운동과,이에 대응하는 우리정부 태도에 바야흐로 온 국민의 「진지한 눈」이 모아졌으면 한다.<상임고문·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