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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입력
1991.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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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을 시발로 금년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시작했다. 노벨상하면 아무래도 문학상과 평화상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데 올해의 평화상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소련인으로서는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반체제핵물리학자 안드레이·사하로프가 1975년,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내세운 집권자 미하일·고르바초프가 199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두사람의 관계가 재미있다. ◆고르바초프는 집권후 고리키시에 유배된 사하로프의 연금을 풀고 모스크바 귀환을 허용했고 복권된 사하로프는 1989련 소련서 최초의 복수후보제로 실시된 연방인민대표회의 의원선거서 과학계 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때까지 사하로프는 고르바초프의 도움을 받았고 그에대한 보답의 뜻인지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인민대표회의의 첫 발언에 나선 사하로프는 고르바초프의 우유부단한 개혁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보다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듣다못한 고르바초프는 사하로프의 연설을 중단시켰고 보수파의 사하로프 비난과 매도에 가담했다. 두 사람의 밀월은 이렇게 깨졌다. ◆6년여에 걸친 유배생활로 건강을 해친 사하로프는 대의원 생활을 1년도 못한채 1989년 12월 68세로 타계했다. 사하로프가 인민대표회의 첫 발언서 주장한 내용은 대폭적인 감군,지원병제의 도입,KGB의 개편이었고 그는 공산당 일당독재 조항의 삭제와 공화국 연합방식의 연방제 개편을 골자로한 개헌안을 제안했으나 고르바초프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당시 사하로프의 주장은 너무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 소련의 체제개편과 정치개혁은 2년전 사하로프가 광야의 외로운 목소리로 주장한 그대로 진행되고 있어 위대한 과학자의 예지와 혜안을 새삼 실감케 한다. 국가영웅의 영예를 박차고 인권운동에 앞장선 사하로프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 흠잡을 수 없이 완벽한 품격을 지녔으나 단지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내세운 고르바초프에게 그같은 품격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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