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일방적인 핵전력 추가감축」을 선언했다. 모든 전술핵을 일방적으로 폐기한다는 것이 가장 큰 초점이다. 이밖에도 잠수함 및 해상발사 크루즈미사일의 철수 등 몇가지 일방적 조치들이 들어있지만,역시 지상 전술핵무기의 일방폐기는 전후 40년에 걸친 「공포의 균형」체제에 커다란 전환을 뜻한다. 더구나 전술핵무기 폐기는 그 누구보다도 냉전체제의 최전선인 한반도의 전략적·정치적 환경에 하나의 커다란 분기점이 그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미국과 소련이 9년동안의 줄다리기끝에 전략핵무기 감축협정에 합의한 것은 지난 7월이었다. 이로써 두나라는 87년의 중거리 핵전력폐기협정,작년 11월의 유럽배치 재래식군사력 감축협정에 이어 동서군축협상을 일단 매듭지었다. 이 세개의 군축협정을 바탕으로 세계는 냉전종식과 그에 따르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해왔다.
그러나 그뒤 세계는 두가지 엄청난 사건으로 무대가 본질적인 전환을 거듭했다. 하나는 크렘린의 쿠데타 3일 천하로 소련공산당이 몰락한 사실이고,또 하나는 걸프전쟁에서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서방측 다국적군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소련공산당의 몰락이 세계의 정치판도를 바꿔 놓았다면,걸프전쟁의 일방적승리는 미국의 군사전략체제에 새로운 디딤돌을 마련했다.
원래 미국의 전술핵과 잠수함 및 해상발사 크루즈미사일은 서방측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재래식군사력을 커버하는 전술·전략적 기반이었다. 세차례의 군축협정에서 제외된 이유였다. 미국이 이러한 전술·전략적 우위를 일방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적어도 유럽대륙에서는 미국이 방어하고 공격해야될 적이 사라졌다는 인식과 자신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경제건설을 위해 추가적인 군비축소를 원하는 소련내 개혁파에게 유력한 정치적 뒷받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달초 미국과 소련 두나라의 국립과학아카데미는 전략핵탄두를 3천내지 4천개로 줄이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낙관적으로 보자면 소련내에 돌발적인 변화가 없는한 전략핵무기의 추가감축을 위한 협상이 뒤따를 가능성이 충분하다. 핵전력 뿐만아니라 동서의 재래식 전력규모의 감축도 가속화할 전망이다. 미국은 95년까지 육군 33%,해군 25% 감축계획을 밝히고 있고,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병력규모를 절반으로 줄이는 계획을 짜고 있다.
이제 미국과 나토의 전략은 최소한의 「핵억지력」을 유지하면서,지역분쟁에 대비하는 「신속대응군」체제로 초점을 옮기고 있다. 크게 봐서 핵전력은 이제 공격력이 아니라 최소한의 「핵억지력」으로 남고,기동타격대격의 신속대응군으로 국제질서를 유지한다는 구상이다.
이러한 전략체제의 개편은 한마디로 말해서 유럽대륙과 대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탈냉전현상이라는데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서 동북아는 하나의 「예외지대」처럼 돼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전술핵폐기는 유럽대륙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전술·전략체제에 50년대이래 최대의 변화를 뜻한다. 동북아의 냉전구조가 유럽에 비해 답보상태에 있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미국의 전술핵폐기선언은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한반도에 커다란 충격을 줄 것이다.
미국이 모든 전술핵을 일방적으로 폐기한다면,그동안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았던」 주한미군의 전술핵도 폐기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로써 주한미군의 핵전력철수를 최대의 흥정카드로 내세워온 북한의 대남 내지 대미전략에 혼란이 올 것은 확실하다.
미국이 모든 전술핵폐기를 선언하기에 앞서,주한미군의 핵에 대해서는 그동안 「일방적인 철수」주장이 미국안에서 영향력을 넓혀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의 예로는 스칼라피노 교수가 이끄는 아시아소사이어티조사단의 보고서를 들 수 있다.
그동안의 논의과정을 본다면 주한미군의 핵전력이 한반도의 군사적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적략적 평가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미국의 막강한 해·공군력이,그리고 해·공군이 제공하는 핵전력으로 한반도에 대한 「핵우산」은 보장된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미국의 전술핵폐기 결정은 동유럽공산권의 와해뿐만 아니라,걸프전쟁에서 증명된 첨단군사력의 막강한 위력에 힘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략적 평가는 물론 한반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주한미군의 핵철수를 흥정의 무기로 삼아온 북한은 평화와 개방쪽으로 보다 한발 다가서는 대안을 내놓아야할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빈사상태에 몰린 경제의 타개책을 위해서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가 될 것이요,김일성주의 체제유지를 위해 고집해온 「고립정책」에는 불길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더 이상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핵안전협정 서명을 거부할 명분을 잃었다. 북한은 당장 IAEA의 핵사찰을 받아들여야할 궁지에 몰린 것이다. 그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의사와 능력이 어떻든,독자적인 핵개발을 체제유지의 지렛대로 삼아온 종전의 정책이 좌절됐음을 뜻한다.
북한은 더 이상 대결을 포기하고,역사의 대세에 순응하는 현실감각에 눈떠야할 것이다. 유엔 동시가입을 또다른 대결의 확대로 삼는 어리석음을 될 수 있는대로 빨리 청산해야 한다. 한걸음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체제 전환을 위해 진지한 자세로 대화에 응해야 한다. 그 큰 전제는 북한이 대한민국의 실체를 인정하고,어설픈 통일전선전략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북한이 요구하는 군사적 긴장완화로 가는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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