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목표에서든 체제의 변질 불가피지난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미국 워싱턴 근교에서 「동북아시아와 한반도」를 주제로 하는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스칼라피노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한반도 연구위원회」가 지난 5월 북한을 방문하고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미국정부에 정책건의서를 작성하는 과정의 하나로 개최되었다. 원래는 남북한과 동북아 주변 4대국의 전문가들이 모두 참가할 계획이었으나 미국무부가 북한의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이 워싱턴까지 여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북한대표는 참가하지 못한 상태에서 토의가 진행되었다.
북한대표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토론의 중요한 초점은 과연 북한도 다른 공산국가들처럼 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중국도 이른바 「개방과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북한이 아무리 지독한 공산독재 체제라고 하더라도 끝까지 변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한반도의 미래가 북한의 변화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북한이 평화적으로,그리고 스스로 변할수만 있다면 한반도의 긴장은 어렵지 않게 풀려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할 수 있지만,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한반도의 앞날에 중대한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민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가 동북아 지역에 남은 가장 심각한 갈등지역으로서 주변 국가들에게도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북한은 변할 것인가?
이번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됐기 때문에 그곳에서 토의된 내용을 여기에 상세히 소개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북한의 변화문제에 대해서는 두개의 상반된 견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북한의 변화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은 적어도 김일성이 사라질 때까지는 어떤 의미있는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피상적인 전술적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김일성의 통치체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으며,특히 북의 통일정책과 대남전략에는 그 어떤 본질적인 변화도 없다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변화가능성을 부정하는 전문가들은 오히려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몰락때문에 북한은 정치적 불안을 방지하기 위해 내부적인 통제를 더 강화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고 대남정책에 있어서도 북한은 그들의 종래의 목표,즉 미군 철수와 남한사회내의 분열조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핵무기 문제도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과는 반대로 북한은 앞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상당히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북한은 이미 많은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북한은 일본에 대한 과거의 적대적인 자세를 버리고 관계정상화를 추구하고 있으며 유엔가입 문제에 대해서도 정책변화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일부 분석가들에 의하면 북한은 유엔 가입문제에 대해 최근에 급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난 2년전부터 상황변화에 따른 정책조정을 준비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정책변화를 할때에는 돌연히 하지않고 매우 신중하게 먼저 내부적으로 정책변화에 대비한 논리를 준비하면서 서서히 점진적으로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어느정도 타당한가하는 문제는 북한에 관한 상세한 자료를 검증해야만 대답할 수 있으며,더욱이 같은 자료를 놓고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타당하다 또는 아니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의 정책은 변하고 있으나 북한의 체제는 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정책의 경우에도 북한의 정책목표가 변했기 때문에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둘러싼 외부환경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한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의 교섭을 시작했고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유엔가입을 받아들인 것이다. 남북대화에 있어서도 북한의 기본정책 목표가 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남북대화의 진전을 미북한간의 관계개선의 선행조건으로 내놓고 있기 때문에 전술적 고려에서 필요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정책변화는 근본적으로 북한의 체제수호를 위한 상황적응의 수단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북한이 아무리 체제수호를 위해 정책변화를 조정한다고 해도 그와 같은 정책변화의 결과는 점차 북한사회를 개방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밖에 없다. 물론 북한의 통치자들은 대외정책의 변화로 부터의 여파가 국내체제의 안정에 악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오늘날 산업사회의 개혁은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모든 독재체제의 권위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소련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고르바초프가 처음부터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하려고 한것은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를 더욱 능률적으로 만들기위해 개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논리는 결국 공산체제의 몰락을 가져오고야 말았다.
북한의 경우에도 체제의 수호를 위한 전술적인 정책변화들은 그 정치사회적 효과가 누적됨에 따라 종국에는 북한 체제의 본질적인 변질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좋을는지 모른다.<사회과학원장·전주미대사>사회과학원장·전주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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