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에 있어서 한국의 내치는 한반도의 전쟁위험을 지나치게 이용했다. 특히 3공,4공 시절의 정치는 온통 북한의 대남도발 위험때문에 지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입만 벌리면 안보요 반공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이나 주요행사 연설 등을 통해 해마다 「앞으로 2∼3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면서 안보 제일주의를 강조했다.
사실 그 당시는 세계정세나 남북관계가 모두 냉전의 대치상황이 고조되어 있을때였다. 밖으로는 월남전이,안으로는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당시의 긴장 상태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3,4공의 집권자들은 이 냉전체제와 기류를 정권유지와 연장에 철저히 이용했다.
71년 12월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국민의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수 있다」며 전쟁위험으로 국민을 위협했다. 잇달아 나온 국가보위 특별조치법 역시 안보를 위해 초헌법적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도록 하기위한 것이었다.
10월 유신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당시의 박대통령 특별선언문 중에는 『현행 법령과 체제는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오늘날의 상황에 적응할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실제로는 냉전시대를 십분 이용하면서도 겉으로는 부인하는 아이로니컬한 현상이다.
정권에 반대 투쟁하는 야당과 재야와 학생들을 억압하는 도구로서 북한의 침략위험이 언제나 이용되었고 그것이 곧 정치의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정권유지의 방패로 이용된것은 3,4공뿐이 아니었다. 5공시절 정권의 정통성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고 있을 때인 86년 정부는 북한의 금강산댐 공사가 남한에 대한 수공용이라고 겁을 주어 시선을 일제히 그쪽으로 돌리게 했다. 코흘리개 어린이의 돼지 저금통까지 터는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법석을 떨었다.
그래서 「평화의댐」이라는 이름의 대응댐을 착공,1년동안 골조공사까지 했으나 북한의 금강산댐은 착공도 하지 않았음이 뒤늦게 알려져 중단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국민을 기만한 셈이 되었다.
지난간 정권들이 모두 냉전시대에서 발버둥치다 간 권위주의 정권 이었다면 현재의 6공은 해빙의 화해시대를 살고있는 민주정권이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덕분에 전정권이 정치도구로 이용하던 전쟁위험도 많이 줄었다.
그래서 6공정부는 종전처럼 북한의 도발가능성을 가지고 구민을 위협하거나 속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할 필요도 없다. 그대신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평화시대를 어떻게 국민과 더불어 잘사느냐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사실 지금 우리는 오랜만에 전쟁의 위협으로 부터 해방감을 맛보는 것 같다.
소련과 수교하고 동유럽 여러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중국과도 가까워 졌다고 좋아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적성국들이 그만큼 없어지기 때문이다. 전쟁위험이 그만큼 줄었다는 얘기이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고 축제처럼 떠들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평화 애호국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겠다고 선서하고 남한과 같은 유엔에 들어간 북한이 감히 도발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축하 사절단까지 이끌고 유엔본부로 떠난 정부당국과 정당 대표들은 이제 평화의 배분을 국민들에게 어떻게 골고루 효율적으로 할것인지를 생각하고 돌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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