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츠청문회 출발부터 “냉랭”/이란콘트라 관련·소사태 분석 실패 추궁/부시정부 신뢰성 “심판”【워싱턴=정일화특파원】 부시대통령의 연속적인 독촉에도 불구하고 3개월이나 끌어오던 게이츠백악관 안보담당 부보좌관의 CIA 국장 인준 청문회가 16일 상원정보위 주최로 H빌딩 216호에서 열렸다.
13일 끝난 클레이런스·토머스 판사의 연방대법관 인준 청문회때와는 달리 처음부터 냉랭한 분위기속에서 청문회가 시작됐다.
로버트·게이츠 CIA국장 지명자는 이날 말쑥한 차림으로 나와 시종 조심스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의원들의 질문에 답했으며 『그때 좀더 적극적으로 좀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잘못했다』 『좀더 의심을 갖고 사건을 추적했어야 했다』는 등의 저자세로 일관했다. 물론 이란콘트라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하워드·메첸바움 의원이 지적하듯 게이츠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않는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메첸바움 의원은 게이츠 지명자가 메첸바움 자신에게만 무려 33번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했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
로버트·게이츠(47)가 CIA국장으로 지명된 것은 이번이 두번째.
그는 지난 87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CIA국장에 처음 지명됐으나 이란콘트라사건 당시 CIA부국장 자리에 있었기때문에 이 사건에 적극 또는 소극적으로 가담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일자 레이건 대통령이 자진해서 지명을 철회했었다.
그후 부시대통령에 의해 백악관 안보담당 부보좌관으로 임명돼 지난 1월 걸프전 당시 기민한 역할을 하는 등 신임을 얻어 6월 다시 부시에 의해 CIA국장으로 지명됐다.
캔자스주 위치타출신으로 작은규모의 명문대학으로 통하는 윌리엄 앤드 메리대를 나와 (65년) 인디애나주립대에서 역사학 석사학위를 얻은후 다시 조지타운대에서 러시아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CIA입문은 66년. 74년에 백악관안보회의 요원으로 발탁돼 여기서 닉슨,포드,카터 대통령을 섬겼고 79년 다시 CIA로 돌아가 행정실,소련 담당관실 등에서 일한후 82년에 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올리버·노스중령을 비롯한 일단의 과격주의 보수파들이 이란에 무기를 팔아 그 대금을 니카라과의 반공게릴라 조직에 건네준 소위 이란콘트라사건때인 1986년 당시 그는 CIA 부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란큰트라사건은 워낙 비밀리에 행해졌고 CIA내에서도 소수특별인사만 관여했기 때문에 게이츠는 이를 몰랐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 청문회에서는 게이츠가 과연 이란큰트라사건과 무관한가의 문제와 그가 미국의 최상급 정보책임자로서 근간에 일어난 소련사태의 분석에 실패했다는 두가지 문제가 대두될 예정이었다. 16일 첫날에는 이란콘트라 사건만 등장했다.
게이츠는 지난 86,87,88년의 적어도 세번에 거친 연설 또는 기고를 통해 밝힌 대소정세 전망에서 『소련은 변하지 않는다』 『미국은 고르바초프의 스타일 변화에 기대를 걸고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비관론을 폈었다.
CIA 최고책임자가 이런 서툰 통찰력을 가져서야 되겠느냐는 비판을 가하는 의원도 있다.
게이츠 청문회는 적어도 18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메첸바움의원은 게이츠가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거듭하자 『기억이 날때까지 청문회를 계속하겠다』고 벼르기도 한다.
지난 81년 레이건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측근인 윌리엄·클라크강 국방차관으로 임명돼 상원외교위 인준청문회에 나왔을때 상원은 야비하리만큼 클라크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남아프리카 대통령의 이름은 뭐냐』 『미국은 앙골라의 어느파에 원조를 해야하나』와 같은 단순질문을 해 지명자가 이것에 대답하지 못하자 『더 얘기할 필요도 없다』며 청문회장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이 사건후 상원인준 청문회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돼 왔었다.
토머스 판사의 인준청문회장도 유머가 넘치는 장면이 많았다.
그러나 게이츠청문회는 상당히 까다롭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CIA가 미국의 이미지를 결코 아름답게 분칠해오지는 못했다는 비난도 함께 섞여있는듯 하다.
상원이 이번 기회에 CIA내막을 어느선까지 까뒤집을 예정이며,게이츠 심문을 통해 부시행정부 신뢰성을 어느정도까지 깊이 따질 것인지를 지켜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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