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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박천에 지하핵실험실”/귀순 북한 고위외교관 고영환씨 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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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박천에 지하핵실험실”/귀순 북한 고위외교관 고영환씨 회견

입력
1991.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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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극심해 개방 불가피/당비서들도 정책불만 토로”/주민들 「사랑의 쌀」을 김정일 특별하사품으로 알아북한의 아프리카 콩고주재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다 지난 5월초 귀순한 북한 외교관 고영환씨는 13일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1시간40분 가량 북한의 외교정책과 실상 등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북한주석 김일성과 김정일 외국원수를 영접할때 보좌업무를 맡았고 김영남 외교부장의 측근이었던 고씨는 북한의 외교정책에 대해 깊은 곳까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등 엘리트 외교관다운 모습이었다.

다음은 1문1답 요지.

­귀순동기는.

『지난해 7월 김정일 40여개 해외대사관 주재 외교관들의 사상조사를 위해 국가보위부 요원을 파견했을때 함께 알바니아 사태를 보도하는 TV를 보며 무심결에 「알바니아까지 무너지니 사회주의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한 한마디 때문에 반체제인물로 평양에 보고됐다. 구후 여러 경로를 통해 신변위협을 느꼈고 마침내 탈출까지 하게됐다』

­북한의 개방 가능성.

『현재 극심한 경제난을 고려해 보면 5년이상 더버티기 어렵다. 다만 소련식이 아닌 중국식 개방을 따를 확률이 크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외부로부터의 개방·개혁 바람에 직면해 있고 당비서들조차 당정책을 비방할 정도로 내부불만이 팽배해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보위부 관계자가 「불순세력을 쓸어버리려 해도 너무 많아 못한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

­북한의 UN가입 결정 배경은.

『지난 2월까지만 해도 해외주재 외교관들에게 내려진 지침은 남조선 단독가입을 방관하고 이를 민족분열과 영구분단 책임으로 반격한뒤 내년에 북한도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이붕총리의 방북이후 국제정세가 북한에 불리하게 조성되고 있는 것을 인지했고 대서방정책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급선회 했다』

­북한의 핵시설은 어떤 정도인지.

『59년 김일성 종합대학에 핵물리학과가 생겼고 60년대중반 박천에 지하핵실험실이 완공되자 이 학과의 1∼2기 졸업생들이 이곳에 배치됐다. 그래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핵물리학과에 들어가면 박천 땅귀신이 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북한은 소련을 비롯,프랑스 오스트리아 동독으로부터 핵기술을 도입했으며 나도 파리에 가서 원자력 공업부 등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다.

핵물리학 전공자들은 모두 박천 핵실험장에서 근무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3년내에 핵무기 개발을 가시화될 것이다』

­핵사찰 거부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북한은 80년대 들어 아르헨티나 파키스탄 등과 제휴해 어떻게든 핵사찰을 거부하려 했다. 최근 북한이 핵안전협정 서명의사를 표명했던 것은 대일수요의 걸림돌을 제거해보자는 뜻이다. 오창림이 협정서명을 거부한 것은 기구내 성원국들의 기를 꺽기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정책은 전술적인 변화는 있겠지만 결국 1∼3년을 끌어서 핵개발을 성사 시키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제사정은.

『지금 북한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88년 평양 인민문화궁전서 부부장(차관급) 이상의 정무원회의가 열려 경제대책을 논의한 자리에서 왜 만년녈필을 생산하지 못하는가라며 만년필 공장 지배인을 문책했다.

이 지배인은 제강소에서 금속을 안대줘서 그렇다고 했고 제강소 지배인은 제철소탓을,제철소는 광산탓을,광산은 철도탓을,철도부는 침목 공급탓을 해 결국 마지막에는 임법부 관계가가 휘발유가 없어 원목수송을 못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았다.

88년 9월 브루키나파노 대통령이 방북했을때 그를 안내해 북한 최대의 중기긱계공장인 대안중기계연합 기업소를 방문했더니 수천대의 설비가 돌아가고 있어 잠시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차관급인 이 공장지배인은 『내게 「국빈방문에 대비해 열흘전부터 자재를 모아뒀다가 방근 5분전부터 기계를 돌리는 것이다. 국빈이 돌아가면 중지했다가 2시간뒤 말라가시 대통령이 오면 다시 돌릴 것」이라고 귀뜸해 참담했다. 이 지배인은 공장가동률이 30%쯤이라고 실토했다』

­남북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의 고위간부들은 70년대부터 80년초까지 통일은 김일성 주석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남조선 당국은 대화의 상대자가 되지 않는 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남조선의 야당과 전민련 등의 재야를 대화상대로 고집해 온것이다. 그러나 80년대말부터 북한 고위간부들은 통일의 장애가 남조선과 미국만의 탓이 아니라 서로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양보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윤기복 조국평화통일 위원장이 경제전문가이기 때문에 학술·체육보다는 경제관계에 치중할 것으로 생각된다』

­북한의 권력승계 시기는.

『7차 당대회가 열리는 오는 93년에야 구체적인 권력승계 논의가 진행될 것 같다. 그 다음해는 김일성의 80회 생일이다』

­남북통일 방안과 그 전망은.

『소련과는 달리 사회주의 고수의사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남북대화의 상대는 남한 정부가 아닌 남한내 종교단체·전대협·전교조 등 재야단체에 국한시키고 있다. 93년께에야 진지한 태도로 대화에 응할 것이다』

­김정일의 사람됨은

『김일성은 인사를 하면 「동무도 건강하라우」라고 받아주는데 김정일은 거만한 태도로 눈길도 주지않아 지도자감이 아니라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김평일과의 관계는.

『김평일과 사진만 찍어도 다 쫓겨날 정도로 김정일은 파벌조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김평일뿐 아니라 모든 친인척들은 콜레라 방역선과 마찬가지로 절처지 차단된 생활을 해야 한다』

­남북한 직교역에 대한 의견.

『쌀의 직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귀순후에야 알았다. 외교관인 나도 북한 주민들에게 배급된 「사랑의 쌀」이 김정일의 특별하사품으로 알고 있었고 남북한 직교역 사실을 아는 주민은 10명이내에 불과하다. 이처럼 극도로 폐쇄된 북한과 직교역 해봐야 북한의 벽이 얼마나 낮아질까는 신중히 고려해야 할것이다』

­소련의 개혁 등에 대한 북한의 의교노선은.

『북한외교의 기본은 우선 한반도주변 4강이 남조선과 결탁해 북조선을 개혁·개방으로 끌어내도록 위협을 가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또 일본과 연내까지 수교,배상금을 받아 경제난을 타개하기위해 노력중인데 1백억달러를 요구하고 있지만 50억달러 정도 받아낼 것으로 보고있다. 소련의 정치지도부와 관계가 멀어짐에 따라 경제심리를 추구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는.

『87년으로 기억하는데 남조선 관광단이 중국쪽으로 백두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고 애국가를 불렀다는 소식을 듣고 김영남 외교부장이 과장급 이상을 불러모아 「중국이 등에 칼을 꽂았다」고 말했다.

김부장은 이 당시 최대한 한중수교를 늦추도록 지시했고 등소평 등 원로강경파와 개인적 친분관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이 작년 10월 중국을 방문했을때 등이 「미북수교 이전에는 한중수교를 않겠다」고 말했다는데 내년 상반기까지는 이것도 무너질 것 같다』

­북한 외교관의 위상은

『북한 최고의 인기직업이다. 외국에 나가 돈벌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북한내에서 정치적 신임이 크고 물질적 대우가 좋기는 하나 참사관의 월급이 3백50달러밖에 안된다. 이때문에 외교관들은 면세품을 빼돌려 보따리 장사를 해도 공관유지비용이 모자라 타국 대사관에서 돈을 꾸어쓰는 형편이다』

­지난 87년 KAL기 폭파사건에 대해 알고있나.

『처음 보고받았을때는 믿지 않았으나 국가보위부 고위층의 연락을 받고 알았다. 당시 고위층으로부터 노동자·농민의 국가에서 어떻게 노동자가 탄 KAL기를 폭파시킬 수 있느냐며 KAL기 사건은 남한의 조작극이라고 각국에 호소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증거를 보이며 질문을 하더라도 깊이 개입하지 말고 대답하지 말라는 지시도 함께 받았다』

­그동안 남한 생활에 대한 소감은.

『남대문시장이나 용인자연농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와 먹고 싶은 것을 실컷 사먹이는 부모들의 밝은 표정에 감동을 받았다. 건설현장 과 고급 국산 승용차를 보며 남한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정총리 폭행사건을 지켜보며 외교관으로서 국가망신이라는 인상을 지울수 없었다』<한기봉·원일희기자>

◎불어실력 뛰어나 외교관 박탈/콩고대사관 1등 서기관 근무/고영환씨는 누구인가

고씨는 평북 강계가 고향이며 지난 53년 개성시 인민위 부위원장인 고필용씨(79년 사망)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외국어 학원·평양외국어 대학의 불문과를 졸업,북한에서는 드문 「불어통」이 되었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탓에 지난 79년 6월 정무원 외교부에 배치돼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자이르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외교부 아주담당국 과장,자이르주재 1등 서기관을 거쳐 귀순까지 콩고대사관의 1등 서기관으로 있었다.

외교관 생활 동안 능숙한 불어실력을 인정받아 불어권 국가수반 및 대표단이 북한주석 김일성과 김정일을 예방할때 통역과 영접을 단골로 맡았었다.

그는 지난 80년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김연옥씨(35)와의 사이에 은정(9) 경림(6) 자매를 두었다. 그의 형 방남씨(47)와 영철씨(42)가 각각 만경대약전 기계공장 설계기사와 당재정 경리국 건설담당 지도원으로 있는 등 가족 모두가 북한의 상류계층에 속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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