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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망비 불가린석/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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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망비 불가린석/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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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에 이런 글귀가 보인다. 세종임금(재위 1418∼1450)의 말이다.『함부로 낭비해도 아니되고,인색해도 아니된다(불가망비 역불가린석). 지금 나라의 용도에 혹시 낭비가 있을까 걱정이니,(재정에) 밝은 관리를 택하여 각사경비의 식례를 자세히 정하여,보고하라』(22년 4월1일)

이말 속에 나라 살림을 꾸려가는 대왕의 경륜이 잘 드러 난다. 그 기본은 「불가망비 역불가린석」의 중용철학이며,이를 「밝은 관리」(상명관리)를 통하여,규범을 자세히 정함」(상정식례)으로써 실현한 것이다.

대왕이 대왕다운 것은,집현전 등을 통해 「밝은 관리」들을 키우고 등용한데 있다. 세종대에 여러제도를 정비하는 가운데 관리들의 높고 낮음을 구별하기 위해 흉배를 쓰자는 말이 나왔을때,그들은 이런 말로 반대하고 있다.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높이고,사치한 것을 누르는 것이 다스림에서 먼저 힘써야 할 일입니다. 신은 나라의(실질보다) 겉모양이 지나친 폐단이 있는 듯(이유문승지폐)하여 항상 걱정입니다』(28년 1월28일)

요즘 말로 하면 외화내빈을 경계한 것이다. 세종임금에게는 이런 「상명관리」들이 있었다.

이렇듯 군신의 뜻이 맞아 이룩해 낸 것이,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두드러진 재정개혁,이른바 「전분육등 연분구등」(농지의 비옥함을 6등급으로,해마다의 흉풍을 9등급으로 나눔)의 공법제정이다. 당초 이 방안은 세종12년 집현전 학사 등에게 분부하여 연구를 시작하고,18년에 공법상정소를 설치,26년에 반포가 된다. 그러나 공법이 경기도에서 첫 시행되기는 30년. 그 18년 사이 농지를 측량하고,시험삼아 시행해 보고,의견을 들은 것이 17만명이나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법은 4백여년 뒤 국말까지 그 뼈대에 큰 변동이 없었다. 세종임금의 「상정식례」가 어떤 것이었는지 알만 하지 않는가.

우리 역사의 황금기는 바로 이같은 「불가망비 역불가린석」의 합리주의 소산이다. 그 성과는,세종연간 의창(흉년 구호미창고)의 재고가 8백65만섬에 이르렀다는 기록으로 짐작하고 남는다. 우리 역사에 이처럼 넉넉했던 적이 또 언제 있었을까. 이런 넉넉함이 자칫 한글과 측우기로만 대표되기 쉬운 황금기의 다른 일면이며,그 넉넉함이야말로 황금기를 가능케한 경제적 토대였던 것이다.

이 모양은 유교적 정치의 요체를 그대로 실천한 결과로 볼 수가 있다. 그 요체란 논어 첫 머리께에 실린 「경사이신 절용이애인…」이란 공자님 말씀이다. 요즘 말로 풀면,일을 신중하게해서 인민의 신뢰를 얻고,씀씀이를 줄여서 인민의 복리를 위하라는 것이다. 앞에 본 세종임금의 행적이 꼭 이와같다. 그런 뜻에서 대왕의 치적은 유교적통치,경세제인(세상을 다스려 인민을 구제함)의 한 이상을 구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경세제민의 준 말이 경제임도,모두가 경제위기를 말하는 오늘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물론 경세제민과 오늘의 경제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전에 담긴 깊은 뜻과 성인들의 지혜는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경제를 어떻게 설명하든,그 원래의 뜻이 절약이며,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합리성이 그 근본이라고 할때 더욱 그러하다.

요즘 말하는 경제위기란 것도 따지고 보면,그런 경제의 근본 뜻을 잊은 경제부재의 결과요,옛일에서 배울줄을 모르는 아둔함에 연유한다고 해서 틀림이 없다. 특히 정부가 과소비를 부추기는 듯했던 경제운영의 방만,정책당국자의 방심·방욕,그로인한 경제정책의 방황은 그런 말을 듣고도 남을 것도 같다.

겨우 대통령이 나서서 경제위기를 수습할 방도가 서는 듯하기는 하나,대통령이 그 방도로 제시했던 정부청사의 신축 억제,공무원의 해외출장 자제 등은 1백 몇10억이 들었다는 대통령 관저의 집들이,유엔가입을 경축하는 대규모 나들이와 앞서거니,뒤서거니하여,좀 공교롭게 들린다.

그 사이 경위가 아무래도 「경사이신」라고는 못할것 같다.

곧 국회에 제출할 새해 예산안만해도 그렇다. 33조5천5백억원이라는 그 규모가 문제라고 하나,우선은 「삼삼오오」로 외기 편해서 좋다. 사회간접 자본의 확충이 시급한 만큼 어느 정도의 예산팽창이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산규모는 늘렸으되,경직성 비용을 더 늘려잡아서,정작의 투자비 비중이 오히려 줄었다니,어인 일인가. 팽창예산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경제의 근본 뜻을 생각할 적에,팽창예산의 앞뒤를 맞추는 길을 둘뿐이다. 하나는 줄일 것을 줄여서 투자비로 전용한다는 정부의 자세와 실천이다. 그러기 위해서 행정관리비를 금년 수준으로 동결하고,공무원 증원을 일절 중단할 정도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긴축령이 있은 뒤에도 각 부처와 그 산하기관 단체들의 기구 확장 증원계획이 계속 보도되고 있는 따위가 먼저 없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다음은 기념비적 영조물 계획을 모두 연기하고,대형 프로젝트의 투자 우선순위를 엄밀하게 다시 따져 보는 것이다. 굳이 예시할 것 까지는 없으나,몇조단위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재검토 대상이 많다. 그런것들이 비록 대통령이 공약한 것이라 해도,대통령의 공약 역시 경제의 원칙과 논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대책들이 바로 「절용이애인」이다. 「불가망비」와 「불가린석」을 함께 관철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예산정책이 달리 있을 턱이없다.

경제위기의 주범인 과소비를 잡는다고 정부는 세무 수사기관까지 동원한 단속을 펴고 있다. 그러나 그에 앞서서 정부가 지금까지의 「문승지폐」를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의 단속은 책임전가나 다름 없어진다. 수입규제라는 공연한 시비나 부르기 십상이다.

그래서 남은 처방은 「자린고비 정부」하나 뿐이다. 그것이 정부시책의 신뢰를 회복하는 첩경도 된다. 그 자린고비 기풍이,위에서 아래로 물흐르듯 할때,비로소 경제위기가 가실 수가 있다. 그렇게 할만한 정부의 새로운 경제철학과,「상명관리」 「상정식례」가 기다려진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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