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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87년전 실전기록 「당포해전도」 의의/박태근 사학자(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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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87년전 실전기록 「당포해전도」 의의/박태근 사학자(특별기고)

입력
1991.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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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수군 25척이 맹공/중무장 왜선 섬멸 생생히/꺾이는 적기·병선이동 모습 한눈에/“임란 이후 최대 전과”… 이경준·신여량장군 전공기려 선조가 지휘관들에 하사국내 유일의 해전도 「당포전양승첩지도」는 당포해전의 전모를 기록한 사료 「등록유초」의 뒷받침으로 역사적인 평가가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비변사의 공식문서인 「등록유초」 역시 지난 87년 사학자 박태근씨에 의해 서울대 중앙도서관 규장각에서 발굴된 사료인데 여기에는 당포해전의 내용과 이 해전에서 격침된 왜선의 임무와 항로,체포된 포로심문 내용과 포로의 처리과정이 소상이 적혀있다. 박태근씨는 최정간씨(근세한·일교섭사전공)와 함께 「등록유초」의 기록을 토대로 당포해전을 이끈 신여량장군의 후손 고령갑씨 문중이 소유하고 있던 이 그림의 역사적인 의미를 규명하게 됐다. 박태근·최정간씨는 이 해전도의 역사성을 드높이자는 뜻에서 주간연재물로 「임난4백년」을 내보내고 있는 한국일보를 통해 지상공개 했다. 해전도와 함께 박태근씨의 기고문을 싣는다.<편집자주>

지난 8월22일 태풍 「글래디스」가 몰고온 거센 풍우를 헤치고 최정간씨(근세한·일교섭사전공)와 함께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살고있는 임란의 명장 신여량장군의 후손댁을 방문했다.

1604년(선조37년),당포(경남 통영군 산양면 삼덕리)에 침입한 왜선을 격파한 신여량장군의 전공을 기려 선조대왕이 하사한 어사도 『당포전양승첩지도』를 찾기위해서이다.

이 역사적인 해전도는 지난날 이은상·맹인재 두분이 살펴보기도 했으나 사료의 뒷받침이 없어 역사적 위상이 정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4백년 가까이 이 그림을 고이간직 한 후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4백년 가까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온 이 해전도의 의미는 지난 87년 발굴된 「등록유초」에 의해 재조명될수 있었다(한국일보 87년 10월10일자 참조).

○하룻만에 투항받아

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신장군의 후손 신봉기씨 등 고령갑씨 후손의 제보를 받은 필자는 이 그림이 「등록유초」에 기록된 당포해전의 전투기록화임을 확인할수 있게된 것이다.

당포해전이 발생한 1604년은 임란이 끝난지 6년이 되는 해였지만 이때까지 한·일 두나라 사이에는 강화조약이 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수군의 통합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은 경상우도 고성현 두용포(현 충무시)로 본부기지를 옮기고 왜군의 재침에 대비,부산을 전초로 하여 남해 전수역에 일급 경계태세를 펴고 있었다.

이해 여름 6월14일 낮. 삼도수군 통제영의 직할수역 서쪽끝을 막고 있는 미조항진(현 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수군검절제사 이섬의 긴급보고가 통제영으로 날아들었다.

즉 사시(상오 9∼11시)에 쌍돛대를 단 국적불명의 「흑색대선」이 추도(현 경상남도 통영군 삼양면 추도리)에서 당포해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당포라면 통제영 서쪽 육로로 20리,수로로 30리 거리. 통제영 바로 눈앞에 적선이 침입한 것이다.

이섬의 긴급통보를 받은 통제영 즉각 우후(참모장격) 신여량지휘하에 주력함인 판거선 함대를 긴급 출동시켜 적선을 요격하게 했다.

7년 왜란을 거치면서 육전에서 숱한 전공을 쌓은 이경준장군은 1603년(선조 36) 2월1일 제6대 통제사로 부임,원대학 전략 적견지에서 신여량장군과 함께 통제영을 두룡포로 이전,세병관을 비롯한 방대한 기지건설 사업을 진행중에 있었다.

통제영 앞바다까지 침투(사실은 표류)한 왜선은 수백명이 탑승한 대형 중무장 선으로 14일 하오 출동한 조선수군과 밤낮으로 맞싸웠으나 15일 하오 만 하루만에 조선수군의 치열한 화력공격 앞에 무릎을 끊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

생존자는 일본인 31명(여자 1명),중국인 16명,남만인 2명(포르투갈인 1명,종자인 흑인1명)이다.

조사결과 이배는 일본의 단순한 동남아시아 무역선이 아니라 풍거수길이 죽은후 일본의 통치자가된 이른바 「정이대장군」인 덕천가강이 캄보디아 왕국과 통상관계를 맺기위해 처음으로 캄보디아에 파견한 무역사절선으로 밝혀졌다.

이배는 4월17일 캄보디아 왕국의 수도 프놈펜 항구를 출발,일본의 장기로 가던중이었는데 오랜 무풍속을 두달 가까이 항해하다가 6월12·13일 폭풍을 만나 항로가 서쪽으로 이탈한 것이다.

왜선이 왜선이 대망의 육지를 발견하고 일본땅 구주의 오도열도로 착각한 곳이 적국인 조선 남해안 땅,그것도 조선수군의 본영인 통제영이 자리잡은 해역이었다.

덕천가강은 캄보디아 국왕에 보낸 1603년 1월의 첫번째 국서에서 자신이 발행한 무역허가장인 이른바 「주인상」을 소지한 자와만 교역할 것을 요청하고 아울러 신사로 황정을 보낸다고 했다.

이 국서는 덕천 부시대의 외교통상 관계 문서집인 『통항일람』 『외번통서』 등에 실려있다.

임란후 한·일 강화조약인 이른바 「기유약조」가 체결되기까지 1598년∼1609년 사이의 양국관계는 준전시 상태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재침에 대비,강력한 해방태세를 펴고 동·남해 수역에서 초계활동을 강화했다.

이경준·신여량장군이 덕천가강의 무역선을 격침한 사건은 1895년(고종 32년) 삼도수군 통제영이 해체될때까지 임란이후 약 2백90년간 조선수군이 올린 최대의 전과라 할수 있다.

한편 덕천가강은 실종된 배의 안부를 묻는 국서를 캄보디아에 보내기도 했으나 배가 영영 돌아오지 않자 조난한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설마 귀국직전에 조선수역에 들어갔다가 조선수군에 격침 당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리라.

선조는 임란후 최대의 전과라고 치하해 특별히 「상가교서」를 내려 작전지휘관인 신여량장군을 절충장군(정3품)에서 종2품인 가선대부로 특진시키고 이경준·신여량장군이하 유공지휘관 28명 전원에게 영광의 기록화된 『당포전승첩지도』를 하사했다. 한편 중국정부는 이경준·신여량장군과 최초의 발견자 이섬장군을 포상했다.

『당포전승첩지도』는 이른바 견본채색으로 세로 1백20㎝,가로 68㎝ 크기의 족자형태의 그림이다. 화면은 당시 유행했던 계회도 형식을 따서 화제,그림,좌목(명단)의 삼분법으로 구성했다.

전투장면은 매우 생동감이 넘친다. 적선인 쌍범대선을 조선수군 판미선 총 25척이 포위 공격하고 있다. 왜선의 좌현에 2척,선수에 2척,우현에 1척 도합 5척이 접근해 활을 쏘며 맹공을 퍼부어 왜선의 깃발이 바다에 떨어져 그들에게 다가올 처절한 운명의 순간을 암시해준다. 접근전을 펴고 있는 5척의 조선 수군은 사격동작을 취하고 있으나 포위중인 그밖의 20척은 교전동작은 취하지 않고 그래서 5척의 접근전 모습이 더욱 돋보인다.

○전립쓴 신장군 독전

공격선 5척의 지근거리에는 화려한 기류로 장식한 아마도 기함인듯한 거대한 판미선의 장대에서 전립을 쓴 신여량이 앉아 독전하고 있다. 조선군사는 전원이 착모한 반면 일본인은 민머리에 그들 특유의 왜상투를 드러낸채로 창·칼을 휘두르면서 단말마적인 반항을 한다. 조선군선 25척 사이에는 연락용 보트인 사후선이 즐비하게 깔려있다. 화면 우측 구석구석에는 당포의 육지가 돌출해 바로 통제영 앞바다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또 육지에 가려서 선체는 보이지 않으나 위에 치솟은 2개의 군기로 보아 군선 2척이 전투현장으로 지원차 이동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은현법은 전투의 클라이맥스를 매우 극적으로 연출한다. 그림속의 조선 수군은 총 2백33명,적선상의 일본인은 21명을 헤아린다.

당시 통제영은 대일 전력증강을 위해 「첨방(지원)」 제도를 썼다. 「첨방」이란 본영의 직할병력외에 전랴좌수영에서 5척,전라우수영에서 15척,충청수영에서 10척씩 매년 적침이 예상되는 시기,즉 2월부터 7월까지의 6개월간 차출한후 원대복귀 시키는 특수편제를 말한다.

「좌목」의 각급 지휘관은 본영이 10명,전라좌수영 6명,전라우수영 5명,충청수영 7명으로 보두 28명이다.

정유재란(1597년)때 남원 전투에서 잡혀 일본으로 여행된후 구사일생으로 탈출,중국을 거쳐 귀국한뒤 『금계일기』라는 유인기를 남긴 노인이 여도만호로서 당포해전에 참전해 설욕했다. 오늘날 『당포전양승첩지도』는 신여량 노인장군의 유품 2벌만이 전해진다.

『당포전양승첩지도』는 위에 언급한바와 같이 1604년 당포해전의 역사적 기록화이자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해전도임을 밝혀준다. 지금까지 학계일각에서 해전도로 잘못 전해저 온것은 모두가 이른바 『삼도주사도분군도』에 속하는 조선수군의 합조원(훈련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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