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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미학/김창열칼럼(토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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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미학/김창열칼럼(토요세평)

입력
1991.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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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총회는 해마다 9월 제3화요일에 열린다. 올 날짜는 9월17일. 회기는 대개 12월 중순까지 간다. 우리 정기국회의 일정도 비슷하다. 국회법은 그 개회날짜를 9월10일로 못박고 있다. 법이 정한 회기는 최장 1백일,늦어도 12월18일에는 폐회한다. 요즘도 간간이 들리는 유엔정국이란 말은 이처럼 엇물린 일정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유엔가입이라는 외교적 성과와,이를 계기로 한 여·야 수뇌의 동반나들이가 국내정치,빠르면 이번 정기국회에 어떻게 투열될지가 유엔정국이란 말의 함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의 이목은 당분간 바다건너로만 쏠리고,정기국회 초장은 개점휴업이나 다름 없을 것도 같다.그러나 나는 유엔가입이 어떻게 유엔정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유엔정국이란 말이 풍기는 밀원·밀실·밀약의 이미지가 싫다. 한 나라의 최고 정치지도자들이 나라 밖 호텔 밀실에서 이마를 맞댄다,국민의 눈길이 닿지 않는 그 곳에서 무슨 밀약을 한다,그것이 크게는 정부형태와 대권구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그런 관측 또는 발상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어정쩡한 것이다. 아무리 뒤진 정치라도 정치를 그렇게 할 수는 없고,아무리 순한 국민들이라도 그런 정치를 용납할 까닭이야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본다면,유엔정국 운운은 분명 무엇인가 우리 정치가 잘못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인 것 같다. 그런 억측을 불러 낸 것이 유엔가입에 들뜬 정부의 호들갑이라면 그 역시 곱게만 보아줄 수는 없다.

유엔가입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맞으며,우리에게 있어야할 것은,분명 외교를 내정에 끌어들이는 듯한 호들갑도,거기 휘말린 어설픈 정론도 아니다. 오히려 이런 형국을 보며 아쉽기는 유엔가입을 그것대로 평가하고 대응하는 냉정함이다.

그 모범을 우리는 18년전 9월의 제3화요일(73·9·18) 동서독 유엔가입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날 서독의 쉘 외상은,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이제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됨」을 강조했다. 브란트 수장은 『오늘은 자랑할 날도 슬퍼할 날도 아니다』라고 했다. 대조를 이룬 것은 동독외상 빈처의 말이었다. 그는 동독의 유엔가입을 『감동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때와 지금,독일과 우리의 처지가 다른것은 당연하지만,그렇다면 우리 나름의 유엔가입 평가와 대응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유엔정국 따위가 아닌 유엔국회. 유엔가입에 따른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개,우리의 국제적인 위상을 마땅히 토론해야 함은 물론이지만,유엔가입이 여러분야의 국회활동을 요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우리는 작년에 이미 아동의 권리에 관한 유엔 협약에 서명했으나 아직 비준을 하지 않고 있다. 그 협약을 유보없이 비준하고 지키자면,아동법제를 정리하고,시책을 재정비해야 한다. 유엔가입의 외화를 내실로 연결시킬 유엔국회가 그래서 아쉽다.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은 지난 50년대이래 우리의 숙원이었다. 이제 유엔가입이 되면 ILO가입은 자동적으로 된다. 그러나 ILO의 많은 협약을 유보없이 지키자면 노동법 여러곳을 고쳐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유엔 여성차별 철폐협약에 가입했고 비준을 마쳤다. 당초 협약의 5개 조항을 유보했다가 89년 가정법 개정으로 유보조항은 단 하나 동성동본 금혼제도만 남게됐다. 그러나 지금 여성계에서는 금혼제도 외에도 여성관계법의 차별조항이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역시 국회가 대응할 일이다.

­유엔인권협약도 비슷한 경우에 든다. 아직 유보조항이 남아 있을 뿐아니라 법과 관행이 모두 협약정신에 못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협약은 구속영장의 실질심사를 요구하고 있으나,정부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이를 외면하고 있는 것 등이다. 특히 인신보호제도에서 국회의 과감한 입법활동이 요구된다.

­내년에 체결을 예정하고 있는 유엔 환경협약은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국회로서 대책을 독촉해야 함은 물론 환경법도 미리미리 정비해 두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몇가지 예시에 불과하다. 하나 하나 세세한 조항까지 따지자면 국회가 할일은 너무나 많다. 유엔의 여러 협약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협약들은 일부조항을 유보할 수 있는 길을 크고 유예기간을 두기도 한다. 그러나 유엔헌장과 여러 협약이 인류발전의 공준과도 같은 것이라면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새로운 유엔회원국의 의무로서만이 아니라,유엔가입으로 국제적인 발언권을 확보한 우리로서 의당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성열도와 민주화도를 높이는 길도 된다. 유엔가입을 이같은 노력의 한 계기로 삼아야 하고,이 역할의 큰몫을 국회에 기대할 수 박에 없다.

오는 24일로 예정된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도 이런점을 언급했으면 한다. 지금까지 들리는 말로는 대통령 연설은 동서문제를 비롯한 「천하공대론」을 포함하고,남북한 관계의 획기적인 제안을 담을 것이라고 하나,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주적 정통성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기약의 강조를 뜻한다. 그렇게해서 여·야당의 지도자가 대통령과 동반하는 까닭도 바로 민주화 공약에 있는 것으로 이해될때라야,유엔가입의 미학이 온전하리라 생각한다.<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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