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한국계임을 떳떳하게 내세우면서 살아가고 있는 단군의 자손은 도예가들이 뿐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때 남원성에서 볼모로 잡혀가서 3백년동안 도공으로 가업을 이어온 사쓰마야키(살녕소)의 14대 종손인 심수관이 그 대표적인 예. 비취색 청자와 순백 백자의 본고장인 한국이 일본 도공의 성지이기 때문에 일본에 자리잡은 한국계 도예가들은 자랑스럽게 자기 뿌리를 내세우고 있는지 모른다.하지만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은 자기를 감추고 일본 이름으로 행세한다.
안씨는 야스다(안전)로,김씨는 가나야마(김산)나 가네다(김전) 등으로 둔갑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일본사람인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그만큼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심하기에 그 어려움을 피하거나 해결하기 위함일 것이다.
더욱이 인기를 생명으로 하는 가수나 연예인들에게는 한국이름으로는 일본 무대에 서지못한다는 것이 오랜동안의 불문율처럼 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계라는 사실을 숨기고 8년동안 인기가수 생활을 해온 재일동포가 『난 한국인 3세 박주리』라고 공식으로 표명하고 나서 일본과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어려운일을 해낸 용단의 동기와 배경은 무엇일까.
「후지카와·지아키」(등천천추)라는 이름으로 더 잘알려진 박양은 일본사회에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많은 차별을 받기때문에 두개의 이름으로 살아올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 사실을 우연히 안 가수 패티김의 충고를 듣고 자기를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8년 동안의 가짜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겪어야 했던 갈등을 청산하게 됐다는 박양에게서 우리는 연민보다도 대견함을 더욱 느낀다.
현재 동경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제2의 가수생활을 벌이기 시작한 박양은 4일 고국을 찾아 『두얼굴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면서 앞으로는 한국인으로 떳떳이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박양의 한국인 선언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릴수 없는 것은 그가 보인 상징성 때문이다. 그는 67만여명의 재일동포가 겪어야하는 고난의 한 전형으로써 우리 가슴에 와닿는다. 일제 통치기간과 태평양 전쟁때 끌려가 아직도 전후보상을 받지못한채 갖가지 차별과 박해속에서 살고있는 재일동포와 그 후손들의 어려움을 우리는 잊고있는게 아닌가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박양의 선언을 계기로 재일동포 사회에 뿌리찾기운동이 적극화 되기를 기대한다. 아무리 정교한 정책으로 말살하려해도 민족혼은 쉽사리 소멸될수가 없다. 박양의 변신을 흥미거리의 인간드라마로 보지말고 재일동포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 우리가 보다 큰 관심과 애정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을수 있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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