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힘의 의존으로 일관한 유신과 5공의 무한통치는 국민에게 어쩔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양수겸장 격으로 당근과 채찍을 써서 성장과 안정이라는 목표를 독촉했으나 결국 정치적 허무주의를 잠재우지 못했다. 안정속의 발전은 다른 한편 사회 전반에 걸쳐 불신과 불안을 무릅쓰며 허세의 싹을 키워 왔다. 그것은 정치불안의 유일한 대안인 셈이다.6공은 민주화의 지평을 열면서,새로운 정치적 허무주의의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대권 향방에만 정신이 팔린 지도층의 암투,한건주의로 경도한 북방정책,그리고 정치부재속의 부패가 원인으로 지적된다. 따라서 국가목표와 미래지향이 갈바를 잃고 표류하는 형상이다. 이런 허무감에 편승하여 이젠 냉소주의까지 고개를 든다.
지금이 과연 태평성대인가 아니라면 위기의 시절인가,물음을 던지는 국민의 심경은 착잡하다. 저마다 각개 약진에 몰두하고 바쁘니 좀체 판별이 안된다. 한쪽에선 흥청망청하니 어느덧 선진부국의 대열에 끼어든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다른 한쪽에선 그게 아니라고 머리를 젓는다. 이런 가운데 각종 병리가 추악한 모습을 잇달아 드러낸다.
비록 귄위가 붕괴되고 존경은 희박해졌지만 어느 구석엔가 그 잔재라도 남아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차례 차례 무너져 간다. 정치 지도층은 이미 경멸의 대상으로 밀려났다. 그들이 신망을 되찾아 보겠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스승의 양식과 의술의 자존은 불씨로라도 남아있을줄 알았는데 그나마 배반의 쓴 냄새를 독하게 풍긴다.
입시부정엔 대학의 총장과 교수가 직접 손을 더럽혀 충격을 가하더니,병역부정엔 의사가 검은 칼을 들고 뇌물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경기장에 나가서 훨훨 날듯이 달리는 운동선수가 멀쩡한 무릎을 수술하고 병역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한다고 뽑아놓은 지방의원들이 파렴치와 추태는 구토와 더불어 공분을 토하게 한다. 억지 춘향격으로 활동비라는 명목의 봉투를 나눠 갖고도 당연한 관례쯤으로 알고 여론을 원망하는 눈치가 역연하다.
시리즈처럼 엮어지는 배신의 연속이 어지럽다. 「브루터스 너 마저…」이 극적인 대사는 배반의 칼에 쓰러지며 터뜨린 시저의 마지막 절규이다. 이만큼 처절한 대사를 몇번이나 되뇌이고 살아야하는지 암담할 따름이다. 부정과 부패의 배신의 바람은 또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른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게 바로 냉소주의가 움트고 번질수 있는 토양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것은 총체적인 병리현상에 대해 경고의 소리가 안들리는 무감각이다. 현실을 일깨우려는 외로운 광야의 외침이 없다. 조소와 험담은 있어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위기 의식과 의지의 표현은 실제로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사회구조에선 위기 관리의 최고책임은 정부에 돌아가게 마련이다. 먼저 운을 떼야 실마리가 풀리고 흐름이 잡힌다.
정부는 사정 차원의 단속이라는 보도를 다시 꺼냈다. 호화·사치·위법을 세무조사나 자금출처 조사를 통해 다스리고 척결한다는 것이다. 분위기라도 잡아가는 효과를 노렸겠으나 정작 반응은 시큰둥하다. 안보와 사회정화 차원에서 사정으로 이어지기까지 척결의 약속을 한두번 들은게 아니다. 그때마다 일관성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냉소주의나 촉발한것은 무리가 아닐것 같다.
「사정의지」를 굳이 삐딱하게 볼이유는 없다. 나 몰라라 눈 감고 방임하느니 움직이는것이 백번 옳다. 시기가 늦은 것을 탓할만 하다. 정부가 나섰으니 호응도 따름이 마땅하다. 다만 한가지 의구는 밝혀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병리현상을 보는 정부의 시각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말한다. 썩은 가지만 쳐내지 말고 그렇게 만든 뿌리를 건드리는 과감한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그것을 그냥 놔두면 또 한번 헛수고와 엄포로 끝나고 말것이 너무도 뻔하다. 잡초나 뽑고 가지치기로 근본을 잡는다는것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위기관리가 아닌 위기의 연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접근방법의 대전환이 시급하다. 호사·퇴폐·위법의 온상은 부정과 부패구조임을 직시함이 옳은 순서일 것이다. 부패의 구조화가 관과 민을 가림없이 두루 퍼져 있는 심각상을 숨겨서는 사정의 척결은 구호에 머무를 따름이다. 한국일보가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현장 출동」만 보아도 달리 실례를 찾을 필요가 없을줄 안다. 원인을 방치한채 나타난 결과와 현상에 매달리면 응급조치는 되어도 왼치는 안된다.
부패와 부정의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부담으로 돌아온다. 근본을 다스리지 못하는 한 이런 부담은 더욱 가중되기만 한다. 냉소주의가 왜 생기는지는 자명하다. 6공이 남은 기간에 쌓아 올릴 치적은 냉소주의의 극복이다.
거창한 공약사업을 제쳐 두고라도 부패구조의 개혁에 착수하고 성공을 거둔다면 최대의 치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정부는 위기의식을 갖고 본과 말을 판단하여 국정의 선후를 가려가야 할것이다.<논설위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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