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언론들은 소련사태를 「제2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레닌혁명을 부정하는 옐친혁명,공산혁명 74년만의 탈공산혁명이다. 그러나 그 요동이 시작된지 열흘이 지나도록,그 소용돌이가 무엇을 낳을지,어디까지 갈지,그 혁명이 과연 성공할지조차 종잡을 길이 없다. 더구나 그 혁명의 소용돌이가 북한과 중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그것이 한반도와 그 주변정세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는,아직 에측불허라고 할수밖에 없다.이처럼 정세가 불투명할 때,전문가들은 흔히 여러 갈래의 시나리오를 상정한다. 모든 가능성을 짚어서,그 각각에 대한 대응전략을 구상해보는 것이다. 예컨대,권위 있는 외교잡지 『포린·어페어즈』는,이번 소련사태가 나기 직전 올 여름호에서,①고르바초프식 개혁과 혼란의 계속 ②민주개혁의 실현 ③보스세력에 의한 롤백 ④내전에 의한 연방붕괴 등 소련의 앞날을 점치는 4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었다. 이들 시나리오를 빌려서 말을 한다면,이번 사태로 그중 ①과 ③의 시나리오가 사라졌고,지금 진행중인 것은 시나리오 ②「제2의 혁명」 상황이다. 그러나 시나리오 ④는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 정부의 대소정책이 조잡하고 성급해 보이는 까닭은 당초에는 시나리오 ②에 경사됐다가,지금은 시나리오 ④의 유효성을 경시하고 있는데 연유한다고 할수가 있다.
90년대 중국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그려왔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①보수세력 득세=모체제로의 회귀 ②개혁세력 득세=동구식 민주화 ③중도·보수세력 주도=부분 개혁과 개방 ④중도·개혁세력 주도=개혁과 개방의 점차 확대 등이다. 이중 ③이 등소평의 개혁노선으로,④의 시나리오와 일부 경합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①의 시나리오는 이런 소련사태에 비추어서도 그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 보이고,시나리오 ②의 가능성은 천안문사태 뒤로 일단 주춤하고 있다.
문제는 소련사태가 이런 구도에 미칠 영향,특히 시나리오 ②의 부활가능성이다. 바로 「제2의 혁명」이 중국에서도 가능한가와 직결되는 문제다.
미국 학자들중에는 이미 시나리오 ③의 등소평 개혁을 「제2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있어 왔다(H.Harding:china`s Second Revolution). 그러나 미국 중국학의 원로인 80고령의 존·페어뱅크 교수는 그런 인식이야말로 중국의 역사와 전통,개혁이 빚어낸 사회긴장 등 개혁실패의 요인들을 외면한 환상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등소평 개혁은고르바초프 개혁이 그랬던 것처럼그 자체로 「제2의 혁명」 일수가 없고,다만 「제2의 혁명」을 위한 소지를 마련할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중국이 정말 달라지고 있는지는 먼저 중국사회의 특성을 고려하며,좀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장기적으로는,앞의 시나리오 ③이 시나리오 ④로 이어지고,끝내는 「제2의 혁명」(시나리오 ②)에 이를 가능성이 있으나,아직은 두고 볼수밖에 없다. 다만 이번 소련사태에 대한 중국의 대응을 보아서 확실하기는,시나리오 ③의 현체제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그 경우 우리의 대중국 관계는,물론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도 한계를 지닐수 밖에 없으리란 점뿐이다. 그래서 대중국 관계를 서두를 수록 우리의 외교비용은 비싸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북한의 변화가능성은 어떨까. 국내 전문가들의 소견을 두루 종합해보면 그 시나리오는 다음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을 가능성이 높은 순으로 정리하면,①체제공수 ②김정일의 권력승계(그 뒤의 개혁가능성) ③테크너그랫에 의한 개혁 ④군사쿠데타 ⑤인민교기 등이 된다. 여기 전쟁의 시나리오가 없음은 주목할만한데,다섯 시나리오 모두 익히 들어온 것이라 따로 설명할 것이 없다. 그러나 시나리오 ⑤의 인민교기설은 루마니아 사태 직후 돌출했다 사그러졌고,④의 군사 쿠데타설은 북한 당군관계의 특성에 비추어 가능성이 희박하며,시나리오 ③의 테크너크랫도 그 영향력에 대한 우리측 평가가 주측에 불과하다. 또 북한 시나리오에는 소련과 중국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개혁세력」이 없으며,「제2의 혁명」을 선행하는 고르바초프 개혁이나 등소평 개혁 따위가 지금껏 있어본적이 없다는 사실은 지적되어야 할것같다.
결국 다섯,시나리오중 높은 가능성으로 남는것은 시나리오 ①과 ②뿐이다. 적오도 당분간 북한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변화가 있다면 「변화를 막기위한 변화」가 있을수 있으리란 얘기가 된다. 소련사태가 있은뒤의 북한동향총리회담 연기,이념 강조,거듭되는 휴전협정 위반 트집 등이 모두 이런 관측을 뒷받침 한다.
그래서,물음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우리 정부가 보는 북한변화의 시나리오는 이것과는 다른것일까. 어떤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길래,정부의 대북 구상들이 그리 많고 화려하며,당국자의 말은 왜 그리 많고 가벼울까.
어제 오늘의 예를 들어보자.
청와대의 어떤 보좌관은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은 결국 가까운 장래에 남북의 교류에,그리고 남북의 협력 및 공존에 응해 올것이다』(서울신문 8·29)
같은날 정부의 국방책임자는 요지 이런 말을 했다. 『95년까지 남·북의 실질적인 대결구도가 지속되며,북한의 체제위기에 비례하여 도발위협이 증대된다. 소련사태 뒤 중국의 대북한 군사지원이 강화될 수가 있으며,소련의 국내사태가 악화될 경우 돌파구 모색을 위한 한반도 무력분쟁을 선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한국일보 8·30)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한다는 관점에서,두 사람의 말은 다 일리 있다고 할 수는 있다. 상황이 그처럼 복합적이라서,복합적인 대응이 있어야겠다는 깨침을 얻을만도 하다. 그러나 말을 듣고 있자니,아무래도 눈 앞이 어지럽다.
그 현기증속에 이런 물음이 절로 떠 오른다. 정말이지,북한을 보는 정부의 시각은 어떤 것인가. 왜 대북정책을 서둘기만하고 정책 근거에 대한 설명은 없는가. 차라리,정부는 북한을 어느정도나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모르는것은 모른다고 하는 통일정책이 나왔으면 한다. 통일정책의 가장 확실한 전제가 북한의 불확실성과 불가측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설마…』도 없고 『혹시나…』도 없는 대북정책이 나와야만 요즘 같은 북방 현기증이 가실수 있겠다는 얘기다.<상임고문·논설위원>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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