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천하대란의 교훈/박승평(아침조망)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천하대란의 교훈/박승평(아침조망)

입력
1991.08.27 00:00
0 0

고르비도 이젠 어제의 인물이다. 타임지가 그를 80년대의 인물로 뽑아 역사의 물꼬를 튼 세계의 항해사요,플라톤의 「정치의 도」마저 터득해 코페르니쿠스·다윈·프로이드를 합친 존재라고 치켜 올렸던게 불과 2년전 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고르비의 모습을 보라. 공개석상에서 옐친의 핀잔마저 받으며 주눅들어 있는 얼굴에서 누구나 빛바랜 슈퍼스타의 서글픔을 읽는다.74년만의 본바닥 공산당 몰락은 가히 세기적 천하대란이다. 이 격변속에서 역사는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전개되고 있고,그 과정에서 어제의 영웅도 노도에 휩쓸리는 한낮 포말과 같은 미약한 존재임을 교훈적으로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레닌의 동상이 깨어지고 있는건 마르크스의 이상론에 공산당 독재와 비밀경찰의 틀을 처음으로 꿰어맞춰 온갖 악행을 저질러온 업보요 당위라 치자. 그런데 공산권 해방과 냉전종식의 물꼬를 튼 고르비 마저 아울러 퇴장을 맞게되는 현실속에 천하대란의 무서운 교훈이 깃들어 있다 하겠다. 그러고보면 역사의 전개란 때로 신속하고 당위적이면서 어느 개인의 신화를 무한정 허용하지도 않는것 같다.

이번 고르비의 퇴색도 어찌보면 영광의 절정때 이미 조심스레 예고되고 있었다.

타임지가 80년대의 인물로 고르비를 침이 마르도록 떠받들고 있을때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반대로 고르비에 대해 『어제의 인물인가?』라는 표제로 퇴장당할 운명임을 앞질러 내비추었었다. 동구의 해방이 소련 자체의 자유화 차례로 연걸될께 당연하고,그렇게되면 국민 스스로 직선으로 국가 지도자를 뽑게될터인데 아무리 위대한 개혁자요 해방자라지만 여전히 공산주의자인데 살아남기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이다.

3일 천하로 끝난 쿠데타 직전에도 모스크바 거리에선 개혁의 성과를 펴보이지 못해 죽을 쑤고 있는 고르비를 통렬히 풍자하는 농담들이 풍미 했었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를 소개하자면­고르비가 손자를 크렘린에 데려가자 이번에 실각한 당시 국방상 야조프는 「장군감」이라했고,총리 파블로프는 「은행가감」이라고 했지만,고르비는 『그렇지 않다. 기저귀에 오줌을 싸놓고서도 이 녀석이 웃고 있는걸보면 「대통령감」이 분명해』라고 말했다는 조롱의 내용이다.

민심이 천심이라 했는데,그런 농담이야말로 바로 오늘의 사태를 앞질러 경고하는것과 다를바 없었다 하겠다. 엉거주춤 보수파의 힘을 빌려 권력을 유지하려다 믿었던 도끼에 빌등이 찍혔고,경원했던 옐친에 구조되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고르비의 오늘의 구차한 처지야말로 오줌싸놓고 웃어야하는 꼴과 다름없을 것이다.

공산주의의 탈을 벗지못해 스스로 「루비콘강」을 건널수 없었던 고르비에 비해 과감한 속전속결주의자 옐친은 국민의 힘을 이끌어 탱크를 저지하는데 성공,내친 걸음으로 공산당 해체마저 결행해 새로운 세기의 행동파 영웅이 됐다. 그런데 옐친에게 속전속결의 개혁을 충고했던게 36세의 젊은 하버드 경제학교수 제프리·사그였다니 재미있다. 그 교수는 『수렁은 한달음에 뛰어넘어야지,두달음으로 넘으려 단 빠져버린다』는 러시아 격언을 인용하며 공산당에 의한 경제개혁이란 불가능함을 들어 자유정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의 동시적 속전속결 이행을 촉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르비치하의 소련은 정치 개혁은 미루면서 시장경제 추진을 위한 서방원조에만 매달렸고,반대로 서방은 원조는 미루면서 빠른 정치개혁만을 먼저 요구해왔던 것이다. 이런 교착타개의 몸부림이 출구를 찾다 엉뚱하게 보수파에 의한 쿠데타 기도 해프닝으로 서막이 올랐다가 소련 연방붕괴와 공산당 해체의 엄청난 천하대란과 지각변동으로 제길을 찾아 급격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찰나동안의 쿠데타 기도나 반동적 보수파의 향수어린 몽상은 결국 역사전개에 되레 엄청난 가속도를 붙이는 촉매가 되었을 뿐이었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런 엄청난 교훈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갈등과 상잔과 대결의 숱한 희생을 인류에게 요구했던 고난의 역사가 궤도수정을 위해 꿈틀대는 그 생생한 현장을 우리는 지금 넋잃은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천하대란의 파장이 결코 소련에만 머물수는 없기에 세계적인 것이고 세기적인것이 되고있다. 모두가 『오늘은 좋은날』이라며 옐친을 떠받들고,도움의 손길을 펴겠다고 다투어 다짐하고 있는것은 그런 인식과 공감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통한속에 50년 분단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번 천하대란이란 통일이란 민족적 염원의 실현마저 걸려있는 것이기에 더욱 피부에 와 닿고 교훈적이 될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바로 몇해전 『오늘은 좋은날』이란 남다른 감동과 각오가 있었다. 비민주적 권위와 독선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한 6·29선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남의 불행과 몸부림을 보고 자형할 수 있는게 사람사는 이치일진대,우리도 『오늘은 좋은날』이라했던 스스로의 각오를 안으로 먼저 다지고 실행하면서,이번의 천하대란 마저 그 역사성을 꿰뚫고 그 의미를 포용하는 대승적 자세가 긴요하다 하겠다. 비록 한때의 영웅은 세월따라 사라지지만 역사는 굽이칠지언정 결코 멎지는 않는 것이다.<논설위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