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 공포정치로 정점/「개혁」에 「철의장막」 걷혀【워싱턴=정일화특파원】 74년의 소련공산당사가 종식을 고하고 있다.
마르크스·레닌 사상이 20세기 역사정립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는 또다른 문제에 속하지만 한때 지구의 반이상을 뒤덮었던 공산당은 음모와 사상주입으로 권력체계를 유지해와 20세기 역사의 비정상적이고,비인간적이며 비문명적인 어두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태동은 1848년 당시 29세의 독일 청년 카를·마르크스가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이라는 1만2천 단어짜리 팸플릿을 발행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는 당시 유럽천지를 휩쓸던 혁명열기를 업고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가진자」(브르주아)에 대한 가지지 않은자(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촉구했던 것이다.
사회계층을 가진자와 가지지 않은자로 양분해 이를 투쟁관계로 설명한 마르크스 이론은 당시 젊은 지식인들을 상당히 매료시켰었다. 1883년 일단의 젊은 러시아 지식인들인 게오르기·플레하노프,베라·자술리치 등이 러시아에 「노동해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고 여기에 블라디미르·레닌이 교리교사로 가입하여 소련 공산당의 모체를 만들게 됐다.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황실을 전복하고 공산주의의 낙원으로 가기위한 불변의 법칙으로 여겨졌다.
레닌은 1902년 드디어 러시아 황실의 전복과 공산주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무엇을 해야하는가』(What is to be done)라는 책자에 담았다.
이 책자는 바로 후일 공산당 조직의 지침이 된것인데 우선 회원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으며 조직집행위가 전권을 갖고 모든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방침은 목숨을 건 지하비밀 조직을 생산하게 됐고 이들 철저한 명령 복종 관계의 공산당원들이 러시아 혁명을 이끌게 됐던 것이다.
1903년 러시아공산당은 철저한 명령복종 관계의 과격주의를 택할 것인가,아니면 민주적 방법을 가미할 것인가에 대한 표결에 들어가 19대17로 볼세비키(다수·과격파)가 멘셰비키(소수·온건파)를 패배시키게 됐다.
1917년 2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고 이어 8개월간의 임시정부를 가진뒤 그해 10월 볼셰비키가 전권을 장악해 세계 공산당 팽창사의 막을 열게 됐다.
1920년까지는 이들 볼셰비키가 이끄는 붉은 군대와 이들을 반대하는 백군사이에 내전이 벌어져 러시아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정권장악에 성공한 공산당은 러시아의 모든것을 장악했다.
1924년 레닌이 죽고 레닌 자신조차 그 행동을 두려워했던 스탈린이 권력투쟁 과정을 통해 제2대 공산당 당수가 됨으로써 공산당의 오류는 가중됐다.
레닌시대에는 모든 사유재산을 국유화하고 집단농장화 했지만 생산성을 높이기위해 약간의 사영을 인정하는 신경제정책(NEP) 같은 가변성도 어느정도 있었으나 스탈린 시대에는 오직 당중앙 명령의 복종만 있었다.
스탈린은 철저한 음모,공포,살인정치를 감행했다. 그는 권력투쟁 과정을 통해 레온·트로츠키 등 당원로들을 사정없이 암살한뒤 그가 권력 기반을 굳혀나가는 동안 니콜라이·부카린,레프·카메네프,그리고리·지노비에프를 포함한 거의 모든 공산당 창당멤버를 숙청했다.
1937년이 정점이 되는 이 혹독한 공포정치는 모든 인민의 집단농장화,모든 인민의 집단관리화로 나아갔다.
스탈린 시대에 체포,구금,암살,시베리아 유배 또는 기아로 죽은 소련인은 적어도 1천5백만은 넘는다는 보고가 있다.
한국전 종반기인 1953년 스탈린이 죽고 3대 공산당 서기장으로 니키타·흐루시초프가 등장했다. 당내 반대세력을 누르고 상당한 권력기반을 다진후 1956년 드디어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 경제 및 정치개혁도 상당수준 시도했다.
그러나 1964년 보수강경주의 공산당원인 레오니드·브레즈네프에 의해 실각당한후 흐루시초프는 한적한 연금생활자로 들어가고 대신 브레즈네프의 강경주의가 디시 소련과 전 공산권을 지배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도 바로 브레즈네프 시대였다. 여전히 소련은 철의 장막에 싸인채 서방사회로부터 떨어져 있었고,비밀경찰(KGB)은 시민생활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월남공산화 니카라과 공산혁명 등으로 셰계 공산주의 팽창추세는 더 계속되는듯 했다.
1982년 브레즈네프가 죽고 KGB의장 유리·안드로포프가 당제1서기가 됐으나 2년만에 안드로포프가 죽고 1984년 콘스탄틴·체르넨코가 제6대 소련 공산당 제1서기로 등장했다.
체르넨코 또한 권좌 1년만인 1985년에 죽었다.
3명의 소련최고 권력자인 공산당 제1서기가 2∼3년에 내리 죽어 소련정권을 장레정권이라던 1985년 50년을 갓넘은 젊은 고르바초프가 제7대 공산당수로 취임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의 어두운 역사를 들어내는 굵직한 일들을 했다.
당의 옛 과오를 시인했고,당의 유일한 지배원리를 철회했으며 상당한 수준까지 민주화,경제개혁을 실현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21일 3일간의 크리미아 연금에서 돌아온후에도 자신이 공산당원으로 태어났고 공산당원으로 자란 배경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고 밝혀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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