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벌어진 3일간의 쿠데타 해프닝과 그뒤에 전개되고 있는 상황은 다시 한번 소련과 소련정치의 복잡성과 이중성을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이번 사태는 소련정치 최고의 국방·치안부문의 책임자들이 총망라된 비상사태위원회가 제대로 비상조치 한번 취해보지도 못한채 스스로 와해되고만 실로 싱겁고 어처구니 없는 「한여름밤의 꿈」 바로 그것 이었다. 사실 최근들어 고르바초프 정권에 대한 쿠데타 발발 가능성이 자주 언급되긴 했었다.고르바초프 정권은 과거 6년여에 걸친 페레스트로이카 운동을 추진해왔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국민들에게 제공하지 못했을뿐 아니라,과도한 개혁과 개방정책의 결과로 기득권이 상실될까봐 불안해하는 적대 세력들도 함께 키워왔다. 이렇게 보면 이번 사태는 대단히 불행한 일이긴하나 전혀 예상밖의 일은 아니었고,또 이번의 쿠데타 세력들이 무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탈권 정도는 가능하리라고 예견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렇듯 나름대로는 상당한 거사이유를 가졌고 그럴듯한 인적구성까지 갖추었던 쿠데타 기도세력이 결국 큰소리 한번 쳐보지 못하고 스스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번의 소련 사태에서 우리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것도 이점이다. 그들이 왜 이같은 쿠데타 음모를 하게 됐을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이같은 「계획된 반란」을 그렇게 철저히 무력화 시킨 실질적인 힘이 무엇일까 하는 점에 더 관심이 간다. 좀더 사태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이 나오겠지만 우선 이 시점까지의 제한된 정보로도 몇가지의 중요한 원인은 유추할수 있음직하다.
먼저 쿠데타 기도세력은 러시아 민족주의에 대해 상당한 곡해를 하고 있었던 같다. 쿠데타 세력들은 러시아 민족주의 세력이 그동안 나타내 보였던 반고르바초프적인 태도를 러시아 민족세력이 연방독립과 공화국들간의 관계개선 문제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쉽게 해석했으며 따라서 그들이 거사하면 옐친을 중심으로한 러시아공화국 지도부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민족주의 세력들이 적극 동조는 하지않더라도 반대는 하지 않을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한 듯하다.
현재의 소련 정치현실에서 가장 중심적인 현안으로 등장되고 있는 연방제를 둘러싼 갈등구조에서 러시아 민족과 러시아공화국의 위상과 성격이 일반적으로 곡해되어 온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점은 러시아 민족이나 러시아공화국은 현존하는 소련이나 소련체제에 있어서 가장 중심 세력임과 동시에 또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가장 많은 불만이 축적되어온 세력이라는 사실이다.
러시아가 곧 소련은 아니나,러시아없는 소련이라는 것은 상상할수 없으며,이러한 논리는 쿠데타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의 반란세력들은 러시아와 러시아 세력의 무게를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듯 하다. 러시아의 민족세력들이 그동안 고르바초프를 열광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그렇다고 하더라도 폭력적인 방법을 통한 보수강경으로의 회귀는 볼셰비키 혁명과 소연방의 성립으로 가장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온 러시아 민족주의 세력들로서는 더 더욱 용인할수 없었던 일이었는지 모른다.
둘째 이번 사태를 주도한 반란집단들이 그동안 사회적으로 만연되어 왔던 반고르바초프 분위기의 본질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상황판단의 오류였다. 고르비에 대한 전반적인 인기하락은 바로 그가 견지해온 전반적인 개혁노선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닐뿐 아니라 더 나아가 보수적인 강권정치에 대한 향수는 더 더욱 아니었다. 다시말해 고르바초프에 대한 대안이 보수강권 정권의 재등장일수 없다는 상황인식의 결여가 쿠데타 기도세력들의 가장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셋째 반란세력이 범한 또 한가지의 잘못은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소련이 처한 국제적인 위상과 그에따른 영향력을 과소 평가한 점이다. 소련은 이미 크렘린의 음침한 밀실에서 모든 문제를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내외에 강요하던 그러한 과거의 소련이 아니다. 급변하는 국제사회에서 소련의 위상과 역할은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소련내부의 정치과정에서의 책임성과 도덕성의 문제도 국정치상에 엄청난 반향과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는 이번 쿠데타 기도를 저지시키는데 있어 국내적인 저항못지 않게 세계적인 규탄여론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수 있다.
여하튼 이번 사태가 고도로 계산된 친위 쿠데타일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추측을 배제한다면 이번의 쿠데타 실패는 소련을 가장 잘아는 최고집권층들이 저지른 엄청난 소련정치에 대한 오판의 결과였다고 볼수있을 것이며 이는 또한 소련이 가진 복합적인 이질성과 이중적인 정치문화의 정확한 이해를 다시 한번 요청케 하는 보기드문 한차례의 충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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