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군사정변이 실패로 끝난 원인에 대한 구구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그 가운데 하나로 군부의 전면적인 지지가 없었고 쿠데타군이 유혈진압에 소극적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공산당이 훈련한 군대의 특징이 어느 군대보다도 군사지휘 계통을 존중하고 철저하게 명령을 복종한다는 점을 도외시한 피상적 관찰이라는 반론이 제기될수 있다.
정변 3일동안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반대한 군부대나 이에따른 무력충돌의 위기는 없었다.
옐친을 지켰던 10대의 탱크가 있었지만 6·4 천안문사태때의 중국군부의 동요나 실제로 계엄군이 장안가 일대에 버렸던 수많은 탱크,장갑차,군트럭 등을 비교해보면 이를 쿠데타를 무산시킨 저항 군사력으로 보기엔 너무 미미한 것이었다.
고르비가 연금됐던 크리미아의 별장은 군함과 군대에 의해 완전 포위되고 대량의 탱크가 동원돼 모스크바의 각 요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고위지휘관들은 누구도 정변을 공개 반대하거나 고르비나 옐친을 지지한 사실이 없었고 정변의 실패와 함께 동원병력은 전면 철수했다.
이같은 사실은 모두 소련의 군대가 명령계통에 충실하며 지휘 책임자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점 6·4때 중국의 군대와 하나도 다를게 없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모두 군대는 명분상 당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군은 최고 군사지휘 기구의 명령을 따르게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천안문사건때도 중국군대는 당연히 당의 최고지도자인 당시 총서기 조자양을 따랐어야 했다.
마찬가지 논리로 이번 소련 정변에서도 소련군대는 당총서기인 고르비를 보위했어야 한다. 그러나 중·소 군대가 모두 그렇지가 않았다.
또 소련의 군대가 이번에 유혈진압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군내부 분열로 상당수 군사력이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은 증거이다. 이것이 쿠데타 실패의 주요원인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이 없다. 엘친의 저항 거점을 무력공격,유혈 진압하지 않은것은 야조프 등 쿠데타 주모자들이 감히 그런 명령을 내리지못했기 때문일뿐이다.
이들의 명령만 있었다면 모스크바가 북경의 재판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천안문 사태와 이번 소련의 정변을 통해 군대와 정변간의 관계를 살펴볼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중·소와 같은 거대 공산국가에서는 군대만을 의지해 정권을 탈취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중·소와 같은 나라에서는 군대는 확고한 정치세력과 결합될때 비로소 그 위력을 보일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소련정변의 실패는 군대가 정변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쿠데타 주역들이 자신있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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