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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멋/이병일 편집부국장(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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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멋/이병일 편집부국장(메아리)

입력
1991.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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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쟈크스카」란 습관이 있다. 그 옛날 넓고 추운 러시아에선 손님을 초대해도 제시간에 도착하는 사람이 많지않다. 한사람씩 띄엄띄엄 도착한다. 손님이 전부 도착하기전에는 식사를 시작하기도 마땅치 않아 일찍 도착한 사람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간단한 안주와 술 등 음료수를 따로 내놓는다.이를 먹는동안 손님이 다 도착하면 이를 중단하고 본식사에 들어간다. 이것이 「쟈크스카」란 습관이다. 「쟈크스카」는 상황에 따라선 갖지 않을수도,시작하자마자 중단해야 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넓고 추운 곳에서 사는 러시아 사람들의 지혜라고 할수 있다. 이것이 프랑스로 건너가 「오르되브르」 즉 우리가 흔히 일컫는 양식의 「오드블」이 됐다고 한다. 「오르되브르」란 프랑스어에는 「작품외」란 뜻이 담겨있다. 주전 멤버가 아니라는 뜻이다.

22일 아침 비행기에서 내리는 고르비의 초췌한 모습을 TV에서 보는 순간 「쟈크스카」란 러시아의 습관이 언뜻 연상됐다. 우량아처럼 건강하고 패기에 차있던 멋스러운 옛 모습을 어느 한구석 찾아볼수 없는데서 그도 이젠 주역이 아니란 이같은 불안한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고르비는 3일동안에 너무도 늙어 있었다. 마치 고무풍선에 바람이 빠져 나간듯한 느낌이었다. 손녀를 껴안고 뒤따라 내려오는 라이사부인의 힘없는 모습이 고르비의 처연함을 더 부각시켰는지 모른다.

항상 패기에 차있던 고르비는 여러면에서 세계의 멋쟁이였다. 집권후 세계의 냉전질서를 평화질서로 뒤바꾼 극적인 정책전환은 물론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까지의 소련 지도자와 달랐다. 장막에 싸였던 크렘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도 그였다.

옷도 부인과 더불어 서방세계에서 주문해 입는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19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24차 세계주문복업자연맹 이사회에서 그를 「세계 베스트 드레서 10」의 한사람으로 선출한 것만 봐도 그의 옷차림의 패션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수 있다.

이날은 그러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회색 점퍼차림은 그의 초췌한 얼굴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비행기 여행에 편리한 옷차림이었는지는 몰라도 3일간의 충격과 고뇌를 그의 바짝 늙은 듯한 얼굴과 회색 옷차림이 대변해 주는듯했다.

지치고 허탈한 모습은 차라리 측은하고,지금까지의 멋스러운 고르비는 쉽게 보기 어렵게 됐다는,그의 시대도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 아무리 정장을 하고 그가 애용하는 볼사리노 모자를 쓴다고 해도 그럴것 같았다.

볼사리노 모자를 썼을때의 고르비는 정말 멋이 있었다. 이 모자를 쓰고 비행기 트랩을 걸어내려와 외국 국가원수와 인사를 교환할때는 북극곰인 소련의 국가원수다운 멋스러움이 있다. 그의 볼사리노 모자를 쓴 모습은 영화 「볼사리노」에서 주연한 알랭·들롱과 장·폴 벨몽도가 이 모자를 쓴것 보다도 훨씬 멋들어진다.

서양에서 사회적 지위를 상장히는듯한 볼사리노 모자는 이탈리아의 쥬세페·볼사리노가 프랑스에서 모자 만드는 공부를 하고 돌아와 만들어 내기 시작한 모자의 명품이다. 아무리 모자모양이 찌브러져도 손으로 톡톡쳐 모양을 다듬으면 금방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이 모자를 사랑하는 고르비가 이번 쿠데타의 상처를 떨치고 오뚝이 같은 이 모차처럼 그 멋스러움을 되찾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권력에선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이번 소련사태에서 다시 얻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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